abundance

우주의 풍족함 (2000년 가을의 생각; 2002/5/24)

2000년의 한 가을 날, 직장 부근의 영세민과 장애인을 위한 임대 아파트 앞을 지날 때였다. 여느 때처럼 휠체어를 탄 초라한 행색의 중년 남자들이 길에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눈을 쳐다본 시간이 그다지 길지는 않았지만, 웬지 슬퍼보이는 그 눈빛이 기억에 남았다. 오만한 나는 순간적으로 그와 나 자신을 대조-비교하는 절차를 작동시켰다. 말쑥한 정장에 빛나는 새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나는 그 사람보다 신체적으로, 직업적이고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우월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속된 말로 나는 그보다 훨 '잘났다.' 그리고... 나는 그의 시선에 계속 정면으로 응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처럼 세속적으로 좋은 조건을 갖춘 인간이 영적인 열망마저 커서 신과 조우하는 특혜까지 누렸다는 것이 미안했다.

환상계인 色의 차원, 이 현세에 발묶여 있는 나는 본질적인 영적인 세계를 자주 망각하며 산다. 수행의 수준이 낮은 나로서는 현세를 기준삼아 생각하고 명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선지자들이 공표한 진리를 머리로는 들어도 이 현세에 실재하는 현상으로 내심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다. 선지자들은 신과 우주가 우리에게 선사한 물질적 풍요에 관해서 말하고는 한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지 않고 있음은 자명하다. 세계는 극소수에 의한 부의 독점과 대다수의 빈곤이라는 심각한 경제적 불균형에 직면한지 오래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신이 선사했다는 풍요의 약속을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도 난 믿어보려 애를 쓴다. 그래, 백보 양보해서 오직 나 개인의 차원에서만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하고 수행을 시작했었다. 신의 은총 덕분인지 오래지 않아 나는 내가 얼마나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가를 진심으로 깨달을 수가 있었다. 비록 내 나이와 학력에 비하여 낮은 박봉에 가족들을 겨우 먹여살리며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내가 정말로 필요한 물질들은 충분히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탐내지 않으니 우주가 풍요롭다는 것을 지극히 주관적인 차원에서는 수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문제는 남아있다. 객관적 차원에서는 나의 이러한 지극히 주관적인 수긍이 어떻게 정당화되어질 수 있을까? 직장도 있고(2000년 당시에는), 아파트도 있고, 차도 있는 내가 신의 풍요로움에 대하여 감사한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물론, 이 세 가지 다 가지고 있는 나의 많은 벗들은 늘 빈곤하다 투덜대며 살기는 하지만). 하지만 신께서 우리에게 풍요로운 우주를 선사했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세상의 수많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감히 말할 수가 있겠는가?

이 웹사이트의 링크 섹션에는 'Hunger Site'의 링크가 올려져 있는데, 이 사이트에 가보면 지금 이 순간 한 생명이 아사(餓死)한 지역이 매 1초마다 지도상에서 꺼멓게 색칠해진다. 굳이 우리 나라 밖으로 갈 것도 없이 이 링크 섹션에 있는 자선단체 사이트에만 가봐도 내 곁에 빈곤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 그 빈곤의 처절함이 어느 정도인가하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어떻게 신의 선물인 풍요에 대하여 감히 설교를 할 수가 있을까?

내 능력 밖인 일에 대해서 혼자 죽어라고 고민하지 말고 도움을 청하라는 분이 신이었기에, 할 수 없이 이 문제에 대하여 기도를 드렸다. 가끔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금방 마음 속에 답이 떠올랐다(이런 내면의 응답이 신으로부터 온 것인지 나의 잠재의식이나 아니면 나의 영혼의 레벨로부터 온 것인지 솔직히 나는 알 도리가 없다. 단지 청하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것을 기도를 하고 나면 깨닫게 되는 것이 나에게는 상당히 일상화되었음을 고백할 뿐이다).

"너의 풍요를 다른 이들과 나눌 때 너는 세상이 풍요롭다고 그들에게 말할 수 있다."

아, 그랬구나! 이 문제는 논리와 합리성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행동과 실천의 차원에서만 접근할 수 있는 문제였구나! 더 젊었을 때 루카치나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맑시스트들의 글을 읽었을 때 깨달았던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하였다. 즉, 세상에는 실천(praxis) 없이는 전혀 이해도 접근도 불가능한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어떤 이들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신앙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아주 어려운 말이다. 나도 이것을 이해한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 다르게 표현하면, 선행이 아니라 믿음이 신앙심의 핵심이라는 말일 게다. 동의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선행과 믿음이 별개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믿음에는 선행이 포함된다. 존재는 행위를 포함한다. 풍요로운 존재는 풍요를 주는 행위를 포함한다. 그런 행위를 빼 버리면 존재 자체가 성립이 안된다. 행위없는 믿음은 쉽게 위선자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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