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융, 그리고 神性

'우연'의 문제를 이와 같이 독재자처럼 단칼에 결론 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더 깊숙하고 정교한 천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C.G. 융이 노년에 편지에 적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현재 제가 진행시키고 있는 '우연'에 대한 숙고에, 월쉬류 보다는 좀 더 세련된 시각을 제공해줍니다.

"그런데 숙명이 원하는 것은 - 언제나 그래 왔듯이 - 나의 生에서 모든 외부적인 것은 우연한 것이며 다만 내적인 것만이 실질적인 것으로 쓸 만한 것이라는 점이네. 그 결과 외부적인 사건에 관한 모든 기억이 모두 퇴색해 버렸다네. 아마도 외부적인 체험이란 한 번도 완전한 내 것이 된 일이 없거나, 다만 내적인 발달단계와 일치될 때만 나의 것이었는지 모르네. 나의 존재의 이런 외적인 발현 가운데서 끝없이 많은 것이 기억에서 사라졌는데 아마도 그것은 내가 온 정력을 다해서 그 일에 참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네 .... 나의 內的인 체험에 대한 회상은 더욱더 생생하고 화려해지고 있네."

- C.G. 융의 回想, 꿈, 그리고 思想, 아니엘라 야훼 엮음, 이부영 역, 집문당, 2000, pp. 10, 11.

종교학 공부 중이신 길벗 S선생께서 제게 강력하게 추천해주신 융의 이 자서전은 경이로우면서도 신비로운 역작임에 틀림없습니다. 흔히 표면적으로 알려진 정신의학자-과학자로서의 융이 품고 살았던 내면 세계와 그를 평생 이끌어 온 신성(神性)과의 교류에 관하여 정교하면서도 감명 깊은 필체로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은 번역 또한 훌륭하게 되어 있습니다. 융의 일생에 있어서 신과의 관계가 어떤 무게를 지니고 있었는지는 다음의 글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왜 저와 같은 초보 신비주의자가 융의 이야기를 깊은 공감의 귀로 듣고 있는지도 설명해줍니다.

"나는 신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확실한 직접적인 경험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엮은 이의 진술:] "그의 회상록을 위해서 그가 자신의 개인적인 종교적 감정과 경험을 이야기할 때 그가 전제로 한 것은 독자도 그의 주관적인 경험의 길을 좇으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만이 융의 주관적 표명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의 神의 像이 그 독자의 마음속에서 서로 비슷하거나 같은 특징을 지니는 경우에 가능하다는 말이다."

- 위의 책, p.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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