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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 '고향'을 찾았었다. 고향이래 봤자 서울
한강변의 한 동네. 재개발도 안된 채 연립주택들만 빼곡이 들어차 나무
한 그루 보기 힘들어진 삭막한 동네. 위의 사진과 같은 풍경은 삼십년
전에도 볼 수 없던 곳. 그곳을 찾았었다. 그런 나의 행위가 센티멘탈리즘의
소산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었기에 괜히 부끄러워, 다른 이들에게는
그곳에 다녀왔다는 말도 못했다. 그러던 참에 한 작가가 어디에선가 이런 글을
쓴 것을 읽었다: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퇴행적인 심리
상태라고. 그래서 자문도 해봤다. 정말 그런가? 그땐 미국 명문대 박사
'따왔다고' 만나는 이들마다 '박사님, 박사님'하고 치켜주어서 내 한심한
자의식도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우쭐대고 '잘나가던(제 생각엔)' 중이었는데,
왜 새삼 퇴행적 심리가 일었을까?
그러다 깨달았다. 내가 유년기의
동네를 찾는 것이 퇴행 심리가 아니라는 것을. 난 결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고, 과거에도 그래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난 유년기에서 사춘기로
넘어가던 시절이 심리적으로 복잡하고 불안정했으며 그다지 밝지 못했었다.
내가
유년기의 동네를 찾는 것은 무언가 단서를 찾고자 함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것이 무슨 단서인지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찾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난 나의 내면의 실체(또는 '참 나'; true self)가 항상 간직하고 있었던 나의 본질에 관한 단서를
찾고 있었다. 신과의 관계 위에 내 인생을 다시 세우게 되면서, 나의 현존을
만들어낸 나의 과거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고, 내가 언제나
간직하고 있었을 신의 사랑의 흔적을 찾게 된 것이었다.
유년기에
내가 자라던 곳은 그런 단서를 때때로 안겨주곤 했다. 이 골목, 저 길모퉁이에서
숱한 기억의
파편을 주섬주섬 의식의 주머니에 담으며 걷다보면, 나에게 어둡게
남아있는 과거의 순간들에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시도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씩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 당시 나 스스로 나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던
이기심, 나약함, 소심함,
비열함, 부정직함 등이 나에게 주어졌던 보다 큰 이유를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나의 몸은 옛 동네를 걷고 있었으나 나의 마음과
의식은 나의 유년기를 헤집고 있었다. 그런 행위가 퇴행이 아닌 것은,
그 과정이 나의 재조명, 재해석, 재발견으로 이어졌고, 어둡게 기억하고
있던 과거 내 모습의 극복을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의 어둠 속에 묻혀있던 나의 지극히 부정적인 측면들을, 훨씬 넓은
인생의 캔버스 위로 끄집어 내놓고 밝은 빛 아래서 바라보니, 그 '부정성'이라는 자아중심적
시각이 깨끗한 물로 클렌징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현재의
평화로운 눈길로 그 부정성을 바라보니, 그것들이 그저 순간 순간마다
내게 주어졌던 신의 손길을 내가 애써 뿌리치며 자해(自害)를 가하거나,
신께 응석을 부리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나를 제대로 사랑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것을 다시 한 번 신께 감사한다.
그런데, 올해
들어
내게 일어난 많은 새로운 사건들 중에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재회한
일을 들 수가 있다. 도심 길 한 복판에서 딱 부닥친 친구로부터 시작해서,
술술 풀리는 실타래처럼 옛날 어린 시절의 여러 친구들과 재회하게 되었다.
그들은 어김없이 중년이 되어 있었다. 지극히도 당연한 일인 것을, 한
친구를 만날 때마다 매번 놀라야 했음을 고백한다. 백발이 성성한 친구들마저
있었다. 그러나 그 친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요히 바라보다 보면,
수면 위로 떠오르는 달처럼 밝게 드러나는 모습이 꼭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거의 삼십 년 전에 알았던 어린 아이 때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드러날 때면 나는 환호를 지르고 싶을 만큼 반가웠다.
길에서
부딪치면 서로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나이가 든 지금. 세파를 헤치며
세월로부터 주름살과 흰머리라는 선물을 얻은 내 어릴 적 친구들. 정말로
반갑게도, 그들 모두에게는 내가 기억하는 어린 아이의 맑은 모습이
남아 있었다. 내가 내 의식 속에서 건져 낸 나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어릴 적 친구들의 모습에서도 건져낼 수가 있었다. 이건 시간상으로는
퇴행일지 모르나 의식의 확장과 진보라는 축에서 보면 확실한 전진이다.
워낙이
모임을 즐기지 못하는 체질인지라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도 나가지 않는다.
그저 그들을 다시 볼 수 있었음을 감사할 뿐이다. 모임엔 안 나가지만,
몇몇 친구와는 종종 만난다. 나에게 어릴 적 아이로서 다가오는 그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그들의 진정한 평화와 행복 뿐이다. 만나면 오직
축복해주고만 싶은 상대를 무더기로 만나게 되었다는 것 역시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나의 유년기를 평화로써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과거의 어둡고 아픈 기억 때문에 어린 시절의 어느
시점 이전으로는 되돌아가 보고 싶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안다.
그들이 그 아픈 기억을 치유하여서, 근원에 있었을 자신 본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를 기원한다. 그리하면, 자신이 그러했듯이, 다른 모든 이들도
본디 아름다운 사람들임을 보다 쉽사리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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