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허에 관하여(1) (2001년 2, 3월의 생각; 2002/8/17)
 



                                               

 

문득, 근래에 내가 가까운 이들에게 한 언행들이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눈 속의 통나무는 못보고 남들 눈의 티끌을 탓했던 것이다. '그렇게 바보같이 하지 말고 이렇게, 내가 말하는 것처럼 똑똑하게 좀 해라' 이런 식의 훈수를 두었던 것이다. 시인 고은은 훈수처럼 슬픈 것도 없다고 했었는데.... 갑자기 최근 들어 늘어난 나의 오만행각을 자각했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의 좀 깊은 차원에서 나 자신을 한 번 체크해보고 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달리 표현하자면, 내가 영혼의 차원에서 겸허함을 받아들이려는 결정을 내렸다는 짐작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결정을 존중해주는 신과 우주가 나의 겸허함의 수준을 높여주기 위한 일종의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가동시켰다고나 할까. 이런 프로그램이 진행되다 보면 기독교 신자들이 흔히 말하는 '시험'의 단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 같다(나는 '시험'이라는 개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 단계에서는 내가 이르고자 하는 나 자신의 겸허함을 의심케 하는 사건들의 발생이 베풀어진다. 즉, 나의 오만한 언행이라는 사건들은 나의 겸허함을 키우기 위한 트레이닝 장치로서, 즉, 축복으로서 베풀어졌다는 말이다. 믿거나 말거나.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겸허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이번 내 수행의 화두를 겸허로 삼았다. 작년에는 '판단'이라는 화두로 꽤 오랫동안 수행했었는데.

자전거포 아저씨에게 "에이에쓰(A/S)"라고 말했다. 엉터리 영어라 평소에는 쓰지 않는 말인데. 동네 사람과 차에 관해 얘기하다가는 '쇼바'라는 말도 썼다. 그러고 나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동안 내가 대부분의 내 이웃들이 쓰는 단어들을 엉터리 영어고, 엉터리 국어라고 홀로 독야청청 쓰지 않았던 것이다. 영어 좀 알고 공부 좀 했다는 티를 그렇게 낸 것이지.

엊그제 어릴 적 내가 살던 상도동의 장승백이서부터 노량진역까지 걸어갔다. 강남의 번쩍거리는 거리와는 많이 다른 곳. 육교 위에는 아직도 꾀죄죄한 좌판을 늘어놓고 싸구려 물건을 파는 할아버지들이 있고, 금이 간 유리창을 테이프로 얼기설기 붙여 두고 드럼통 뒤집어 놓은 상으로 손님을 맞는 대포집이 있는 곳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네와는 달리 공기도 나쁘고 길도 좁고 자연의 내음도 맡을 수 없는 곳. 그러나 나는 가끔 이곳을 찾는다. 고향이기 때문에. 그리고 때로는 여기서 소주를 사마신다. 엊그제도 그 거리에서 가장 허름한 선술집에 가서 억센 아줌마들 술타령 한귀로 흘려 들으며 친구와 술을 마셨다. 닭똥집을 내주는 초로의 아줌마와 함께 찌그러진 텔레비젼으로 연속극을 보며 '상투적'이라는 수식어가 아까울 정도로 통속성의 엑기스와도 같은 줄거리에 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평소에 그렇게도 경멸해마지 않는 연속극을 보며. 아, 난 무엇이 그다지도 고상하고 잘나서 내 동포들이 모두 넋놓고 보는 연속극도 하나 안 본단 말인가....

신을 만난 후로 종종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질문: 왜 하필이면 나란 말인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도 많고, 복도 많고, 부족할 것 없는 내가 왜 신의 방문이라는 어마어마한 은총까지 받아야 하는 것인가?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인데.... 나에게 주어진 거부할 수 없는 임무가 있다면, 그건 내가 겪었으며, 겪고 있는 무한한 은총을 다른 이들도 겪도록 도와주는 일인데. 그런 일은 어떻게 해야할까?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설교로써? 글로써? 신의 메시지의 본보기가 됨으로써? 다 그럴 듯한 방법이긴 한데, 가장 중요한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건, '다른 이들을 섬김으로써(by serving others)'였다.

그래서 나에게 겸허라는 화두가 주어졌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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