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은
'판단'이라는 것에 대하여 곰곰이 따져보는 일이 잦다. 예수께서 하지
마라시던 것이 판단이었는데, 인간은 판단함이 그 존재의 근본적인
성향이 아닌가? 오직 판단할 줄 아는 능력에 의해서만 이성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판단하지 말라니, 판단해서는 안
된다니.....
일본의 영화감독인 쿠로사와 아키라의
라쇼오몬(羅生門)을 생각하게 된다. 하나의 사건에 대하여 중첩되는
해석들, 각 개인마다 다른 시각들, 부정확함, 편견, 자신이 개입된 해석.
결국 각 개인마다 현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왜곡된 이해(understanding). 그렇듯 조각난 이해에 근거하여 인간은
판단을 한다.
아프리카의 마사이족의 금언: '사자 사냥의 진실은 죽은
사자의 이야기를 들어봐야만 알 수 있다.' 즉, 사자를 잡아온 사냥꾼의
얘기만 들어가지고는 그 사냥의 진실한 내용을 알 수 없다는 말. 두
개체가 개입되었으니 최소한 두 개체의 말을 들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종국에 판단이라는 것은,
하나의 현실사건에 대한 수없이
다양할 수밖에 없는 해석들 중 하나를 택하도록 강요받는 선택의 작용이 아니겠는가. 그 중의 한 개인의 독특한 시각만이 우월하거나
더 정확하다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그런 각자의 시각에 기초한 각 개인의
결정과 행동 등을 나는 판단할 수가 있는가. 오직 신만이 판단할 수
있을까.
솔직히 내 마음 깊숙이, 나는 그런 판단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요즘 판단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수준까지 나의 판단에 대한 부정이 진행되었는가 하면, 나의 가장
옳은 행위마저도 어떤 사람의 시각을 통해서 보면 매우 그르다는 판단이
성립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주에선 나만이 옳은 것 같고, 그러한 믿음 위에 자신의 모든 사고와
행동을 전개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속성일진대, 나는 그러한 나의
사고와 행동이 아주 그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아주 개인적으로 경멸하는 어떤 타인의
사고와 행동들마저도, 나의 사고나 행동과 똑같은 만큼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신에 의해 부여받은 자율권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판단할 수 없다. 나는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예수의 말씀처럼.
그럼
판단하지 않고 어떻게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학문이란
것을 할 수 있을까? 판단하지 않고 학문이 가능한가?
한 가지
자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판단하지 않고
있을 때에만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신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판단은 자아를 기초로 한 행위이고, 그 자아를 버릴 때에만 절대자와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판단을 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신과의 의사소통(communicability)을 위해서, 일종의 반대급부로써,
나의 인간적인 판단 능력과 기능을 포기하여야 한다는 말인가? 이것
아니면, 저것인가? 아니면 두 가지가 병립 가능한가? 이 논의를 이성과
논리의 수준에서 진전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인간적인 판단이
적용되어야 할 부분과 그렇지 않아야 할 부분을 가치판단의 입장에서
분류한다면 논의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이 아니다. 난 이성도 논리도 가치판단도 쓰고 싶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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