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돈, 돈, 돈. (2002년 4월의 생각; 2002/11/2)

돈 없음은 모든 악의 뿌리다.
- 죠지 버나드 쇼

[4월말 어느 날 새벽 4시 경]
얼마 전 스스로에게 타이르듯이, '그만 궁상 떨고 돈 펑펑 쓰며 살아버려라' 라고 말했다. 지하철에서 듣게 MP3 플레이어도 사고, 자전거 탈 때 쓸 보안경도 사고, 얇은 운동복도 사고, 낡은 안경도 바꾸고, 떨어진 운동화 새 걸로 교체하고, 가족 데리고 먼 데 여행도 한 번 다녀오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통장에 돈이 없다. 적금 깨버리긴 싫고. 최근엔 수금도 계속 안되고 있고. 일한 것에 대한 수금을 조만간 하지 못하면 정말 빵꾸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요즘은 빈 지갑도 일부러 안 채우고 안쓰기 작전으로 버티고 있다.

답답함이 목줄을 죄는 새벽에 눈이 떠졌다. '가장(家長)'과 돈. 유사이래 '가장'인 남자들을 잡아먹어온 절대적 이슈, 돈....

그러나 나는 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고 축복임을. 잠시 기도하니 그것을 금새 깨닫는다. "즐겨라!" 이런 궁핍의 경험을 즐기란 말씀이다. 왜? 축복이고 선물이므로. 즐기고 또, 부끄러워하지도 말라는 말씀을 듣는다. 돈 없음을 즐길 수가 있는가?

그래, 마음 속에서 '걱정'만 밀어내 버리면 즐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 뭔가 보다 깊은 이유가 있기에 이런 경제적 곤란도 겪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이유 - 아마도 뭔가를 깨닫는 것 - 가 충족되고 나면 이런 경제 문제도 그저 사라질 것이다. 분명히 몇 달만에 돈 많이 벌 일감이 생길 거다. 그러기로 결정했으니 그리 될 것이다. 내 마음엔 걱정이 없고 평안하다. 나의 친구 신에게 드릴 말씀은 오직 '감사합니다' 뿐.

정말 작가는 배가 고파야 할까? 지출할 곳은 많은데 수중에 돈이 없으니 마음에 동요가 일고, 이러한 동요의 순간 순간을 의식하는 것이 나를 자각으로 이끌고 있는 듯 하다. 모든 게 만족스럽고 풍요로울 때는 가만히 있는다는 건 따분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괴롭고 아플 때는 숨 한 번 내쉬고 들이쉴 때마다 가슴의 통증으로 살아있음을 의식할 수 있다. 호흡 한 번이 수행이 될 수 있다. 배고프다는 건 - 실은, 진짜로 '배'가 고프진 않지만 - 이렇게 자각하는 수행을 위해 필요한 경험이고, 그런 경험없이 작가가 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같은 날 새벽 6시 경]
흔들리지 않음을 자랑하지 마라. 오히려 현상(현실)에 흔들리는 나 자신을 사랑하여라. 굳센 믿음의 자랑 또한 허세이니. 궁핍함에 흔들리는 나의 극단을 보고 두려워할 때, 그 순간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현상을 껴안아라. 신은 고통 주기 위해 고통을 가져다 주시지 않는다. 모든 고통엔 이유가 있고 모든 고통이 축복이다. 오직 감사할 뿐.

자신이 처한 현실(현상)과 사랑에 빠질 수 있으면(진실로 깊은 의미에서), 그러면 우리 인생의 게임은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가? 개구리에게 키스를 해주어서 왕자를 만난 공주처럼? 궁핍함을 진실로 사랑하고 받아들일 때 궁핍의 스테이지가 막을 내리는 게 아닐까?

[새벽 6시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8시 넘어 깨서]
두어 시간 자고 일어났는데 이른 아침부터 '거래처'로부터 전화가 왔다. 상상도 못했던 일을 맡기고 싶다는 전화였다. 한달 쯤 일하면 옛 월급의 2.5배 정도를 받을 수 있는 일이다. 거기에다가 밀린 수금도 조만간 완결짓고 나면 당분간 서너 달은 우리 처자식 잘 먹여살릴 수 있는 수입이 생기는 것이다. 휴우-, 또 겨우 채웠다. 그야말로 쌀독이 빌 듯하면 어느 새 채워진다. 사는 게 기적이다. 그래서 나는 현실을 즐긴다. 감사의 마음으로.

[당장 그달치 공과금 낼 돈이 부족해서 새벽 어스름에 눈이 떠진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목돈을 손에 쥘 수 있는 일감이 들어왔습니다. 이런 일은 제게 종종 일어납니다. 자꾸 말하지만, 저는 일상의 기적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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