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자전거의 교훈 (2002/12/7)
 


 
 

1.
처음으로 산등성이까지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 내 발밑으로 펼쳐진 내리막길의 경사에 압도됐다.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려 하다보니, 엉덩이 꼭지가 하늘로 쑥 치켜올라가 버린다. 그때 앞바퀴의 브레이크를 잡아 버리면 자전거가 고꾸라지고 만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오른쪽 브레이크를 잡지 말고 뒷브레이크만으로 조금씩 속도를 조절하며, 험한 산길을 무조건 계속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그게 겁이 나서 되지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엔 생각했다. 이건 좀 산악자전거 타는 기술이 향상이 되고 나면 할 수 있는 일일 게다, 차차 조금씩 해보자... 그러면서 무서운 경사에서는 자전거에서 내려 질질 끌고 내려갔다.

몇 주가 지났건만 산에서 자전거 다루는 솜씨에는 별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달라진 게 있었다. 내려오는 경사진 길을 다 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내 앞에 어떤 길이 놓여 있는지 훤히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브레이크를 안 잡고 그냥 계속 내려간다 해도, 느닷없이 나타나는 천길 낭떠러지 같은 건 없고 그저 길이 계속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사진 산길에서도 나의 질주는 계속될 수 있음을 믿게 되었다. 그러자 두려움이 사라졌다. 전에는 벌벌 기던 경사길도 그냥 주-욱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그냥 계속 내려가면 되니까.

오늘의 교훈: 길을 다 알고 있으면 두려움 없이 질주할 수 있다.

길을 알게 되는 데는 두 가지 양태(mode)가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지각(知覺)작용을 통한 관찰에 의해 경험적으로, 그야말로 아는 것. 둘째는 지각을 사용하기도 전에 미리 믿어 버리는 것.

인간의 지각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인생의 내리막길은 한치 앞을 볼 수 없다.
직관적 믿음은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어짜피 질주해야할, 언제나 초행(初行)일 수밖에 없는 인생길, 믿고서 힘차게 갈 도리 밖에.
겁먹고 머뭇거리다가 고꾸라지는 수가 있다.
물론 자전거에서 내려서 질질 끌고 내려갈 수도 있겠지만, 그거 참 따분한 인생 아닐까?

나는 하산길 내 자전거의 질주에 대하여 지각에 기초한 판단은 서 있었으되, 믿음은 없었다. 아주 잠깐 순간적인 핸들 움직임의 착오로 평소의 루트를 살짝 벗어났을 때 나는 자신을 잃고 겁을 먹어 앞 브레이크를 꽉 잡아 버렸고, 그래서 드디어 한 번 세게 고꾸라지고 말았다. 예수님께 다가가려고 물 위를 걷다가 갑자기 겁을 먹고 물에 빠져버린 베드로처럼. 베드로는 옷을 적시는 데서 끝났지만 나는 다리에 부상을 당했다. 제길, 아직도 아프다.


2.
겨울산에는 길목마다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예기치 못했던 장애물.
급경사 언덕을 죽을 힘을 다해 페달을 밟으며 올라가는데, 낙엽 때문에 바퀴가 헛돌아 버린다. 맥이 빠지고 자전거는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한다. 좀 있다 그런 언덕을 살살 내려오는데, 이번엔 쌓인 낙엽 위에서 바퀴가 찌익 미끄러져 버린다. 까딱하면 또 한 번 크게 고꾸라질 뻔 했다. 휴우-

낙엽 때문에 또 겁이 나서 시원하게 질주를 못하겠다.

오늘의 교훈: 나는 낙엽이 밉다.

그런데 낙엽이 때론 재미도 있다. 편편한 길에 수북이 쌓여 있는 낙엽 위로 세차게 자전거를 질주하는 맛도 색다르다. 이런 변화가 없었으면 매일 똑같은 자전거길이 아마 지겨워졌을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교훈이 있나... 모르겠다. (- - ;)


3.
지난 초여름의 폭우가 언덕 길에 깊은 물길을 패어 놓았다. 산의 깊은 상처. 여름은 다 지났고 이제 겨울에 접어들어 산길은 차갑고 단단해졌다. 산길의 그 상처 역시 단단하게 아문지 오래이지만, 여전히 흉터를 가지고 있다. 그 흉터 때문에 내 자전거가 언덕을 올라가지 못한다. 깊이 패인 골에 바퀴가 빠지면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자전거를 멈추고 내려서 밀고 올라가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그쪽 길을 피해서 가게 된다. 상처가 아물었다해도, 흉터 역시 다른 사람을 쫓아 버린다.

오늘의 교훈: 흉터에는 통증의 기억이 묻어 있다.

내 마음에도 상처와 흉터가 많았었는데...
죄다 어디로 가 버렸지?
수술로 몸에 칼을 댔던 흉터의 기억은 십년, 이십년이 지나도록 남아있는데, 내 마음에 가장 큰 출혈을 유발했던 깊은 상처들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흉터조차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나 상황을 가능한 한 생생하게 마음 속에 재현시켜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나 상황에 대하여 아무 원망도 회한도 분노도 감정적 동요도 없음을 확인하면 일단 치유된 것일 게다; 물론 무의식 차원까지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지난 3년 여의 수행기간 동안 나 자신과의 평화를 구하며 과거로 숱하게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나를 껴안는 작업을 계속한 결과인 것 같다. 그 작업은 언제나 신과 함께 했었고.

이제는 현실의 이런저런 일로 마음에 상처를 입어도 도무지 걱정이 안된다. 내 마음의 상처에 감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며, 이 상처는 금세 씻은 듯이 아물어버릴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러하다.

마음 한 구석에서 이런 생각이 고개를 치민다. '그렇게 자신만만 하다가 큰코 다치지...' 하지만 나는 이런 우려 역시 표상의 내 자아가 만드는 것임을 잘 안다. 내일의 상처를 지금 아파할 필요는 전혀 없다. 내일 일은 내일 일. 오늘은 오늘의 상처만 돌보면 된다. 신은 결코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일을 내게 주지 않을 것임을 믿으니까. (설사 아무리 엄청난 재난이 나를 덥친다해도, 막말로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죽으면 좋은 곳에 간다던데... (- - ;)  -- 스스로 보아도 광신도 비슷한 멘탈리티인 듯...)

오늘도 또 다시 그 패인 골 쪽으로 재도전 해본다. 움푹 패인 골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더욱 힘껏 페달을 밟아야만 한다. 아직도 그 골짜기를 정복하진 못했다. 하지만 전보다는 조금 더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산길의 흉터를 다루는 법을 조금씩 배우고 있다. 언젠가는 저 험한 골도 정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상처에 지지 말자.

 

 

'수행일상 2002'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