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

편견에 관하여 (2002/11/30)

<수행 일기라기 보다는 '독자들께 이야기 건네기' 라고 해야겠습니다.>

저의 요즈음 수행 화두가 있다면 그것은 '자유'일 것입니다. 이런 화두는 제가 일부러 머리를 짜내어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며칠이든 몇 주든, 어떤 생각과 느낌이 제게 지속적으로 일어나서 잘 떨쳐지지가 않고, 주변에 그것을 계속 강조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 저는 아, 새로운 화두가 주어졌나보다, 하고 알아채게 됩니다. 그걸 누가 줄까요? 저는 물론 신께서 제 내면을 통하여 주시는 것이라 믿습니다. 어쨌든 자유라는 과제를 집어든 이후로 저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점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편견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스스로, '나 자신은 편견에 별로 지배받지 않고 있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편견 또는 고정관념(stereotype)을 발생시키는 주된 사회적 이질성의 축인 인종, 국적, 출신지, 성별 또는 성적인 지향(sexual orientation), 연령, 사회계급 등등이 그다지 저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에게는 흑인, 일본인, 경상도민 또는 전라도민, 여자, 동성애자 등을 개인으로서 다르게 바라보는 어떤 틀이 없습니다. 그들 모두와 친구가 되보았고 그들 모두를 그들 자신으로 대했을 따름입니다. 그럴 때에만 그들과 저 자신 모두가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저 자신의 태도가 이제는 우리 사회에도 많이 수용되고 있는 보편적인 성향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살다보니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점점 더 느끼게 되더군요. 굳이 매스컴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관찰하게 되는 편견에 가득찬 언행들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제 주변에서도 그런 예는 종종 접할 수 있었습니다. 편견없는 사회를 꿈꾸는 몽상가인 저로서는 저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기에 앞서, 다른 이들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다른 이들을 좁은 틀 속에 발묶어 두고 있는 편견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해봐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제 딸이 다니던 유치원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딸의 반 원아 중 지체부자유아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 아이들이 하나, 둘 그 유치원을 그만 두었는데, 그 이유가 충격적이었습니다. 장애아와 한 반에 있다보면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과도한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그러면 자신의 자식에게 한 번 더 신경 써줘야 할 걸 못하게 되기 때문에, 부모가 아예 유치원을 옮겨 버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런 편견에 시달리고 있는 장애인들이 우리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지...

제가 접해 본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 중에도 자신이 사회로부터 입은 은덕은 까맣게 잊고, 나라 위에 군림하며 오만하게 백성들을 내리깔아보는 편견의 소유자들이 꽤 있었습니다. 국제학술회의에 환영사 10분 하려고 오면서 그 환영사 하나 작성하는데 사무관, 박사들 등 여럿의 고급 노동력을 몇 일씩 붙잡아 두고, 잠깐 들렀다 가는 주제에 '옷 갈아입도록' 비싼 호텔 객실을 잡아둘 것을 요구하는 고관대작, 연예인과 같은 석상에 앉을 것을 거부하는 고관, 재벌 등등. 얼마 전 신문에서 한 최고급 빌라 입주를 계약하던 높으신 분들이 같은 빌라에 연예인이 계약한 것을 알고 계약 취소를 했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도 놀랍지도 않더군요. (사회과학에 'statistical discrimination'이라고 하여, 차별과 편견 배후의 합리성을 지적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으나, 저는 현상의 차원이 아니라 영적 심성의 차원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 곳곳에 만연된 이런 저런 편견은 예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지요.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곤란한 나라에서 일하러 온 사람들 무시하고 차별하기, '전라도,' '경상도' 욕하기, 남자들의 여자 깔보기, 술집여성들 비하하기, 동성애자 인간 취급 안하기, 고학력자의 저학력자 무시하기, 부자의 가난한 이 경멸하기, 연장자의 젊은이 의견 무시하기 등등.... 어떤 사회의 편견과 고정관념 만연도는 그 사회의 배타성과 직결되어 있겠지요. 배타적인 사회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생각과 꿈이 자유롭지 못한 사회는 어쩌면 영혼의 효과적인 수련장이 될런지는 모르나 - 그런 사회가 가져다주는 고난과 장애의 '수련 효과'로 인하여 -, 우리가 지향해야할 곳은 물론 아닙니다. 우리의 자유로워야 할 의식을 속박하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좋은 방법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구체적인 방안으로 빚어지기 위해서는 숙고와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현재 우리 나라에 존재하고 있는 '아시아 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 같은 유네스코 산하 조직도 이런 방향의 일에 이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만, 아마도 저 혼자만의 몽상일 듯...)

저는 지금 오만방자하게도, 저 자신은 편견과 고정관념 같은 것들의 저 위에 무사공평하게 떠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편견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되고, 똘레랑스(tolerance)의 가치를 체득하기까지는 많은 고귀한 경험과 배움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예로, 스물 한 살 때쯤에 미국의 미국역사 클래스에서 베트남 역사책을 읽었을 때가 떠오르는군요.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키도 작고 가난하고 가무잡잡한 베트남 사람들을 일종의 열등한 세계시민 정도로 생각했었나 봅니다. 그 역사책에서, 그들도 우리의 단군신화와 같은 신비로운 개국신화를 소유하고 있고 자신의 민족과 나라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읽고는 놀랐습니다. '아, 세상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똑같이 존엄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것을 그때부터 터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라는 환경은 이밖에도 다른 인종, 다른 성, 다른 의견들을 저에게 끊임없이 제공해주며 그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지요. 그래서 나름대로 편견과 고정관념의 폐해를 민감히 파악하고 스스로를 그것들로부터 떼어놓는 의도적 노력을 추구해왔음을 자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점에 있어서 타인들로부터 받은 최고의 찬사는, 저의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음이 제 앞의 상대방을 평안하게 해준다는 말이었습니다. 저의 오만방자함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나 역시, 저도 이번의 화두인 '자유'의 수행에서 저 자신의 편견과 고정관념 역시 철저하게 파헤쳐 보아야겠죠. 제가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여기에 고백해봅니다. -->

내 안에 계신 신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이들 안에 계신 신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이들 안에 계신 신을 보지 못하게 막는 현상의 구름들을 걷어내기 위하여 우리가 이성의 차원에서 힘쓸 수 있는 것을 들자면, 우리의 편견과 고정관념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편견에 가득 찬 눈으로는 절대로 다른 이가 나와 똑같이 성불할 수 있는 존재임을, 신의 사랑을 가득 받고 있는 존재임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은 나와 다른 이 양쪽에 다 자유를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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