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중

관객의 시선 의식하기 (2002/12/22)

<이 싸이트의 '관객'에게 건네는 말입니다.>

돈도 잘벌고 잘 놀던 이십대 후반, 당시 교제하던 여자가 어느 날 따끔하게 지적했습니다. 너는 폼생폼사라고. 나의 차 뒷유리창 곁에 뒹굴던 'TIME' 잡지를 보고 던진 말이었습니다.

옛날 얘기지만, 한때 대학생들이 옆구리에 타임지 끼고다니는 게 유행이었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런 부류와 나를 동일시하다니' 하는 생각에 내심 분해했습니다. 왜냐하면, 난 정말로 타임을 즐겨 읽었었거든요. 그때는 이미 상당히 미국문화에 동화된 후에 서울에서 직장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분했지만, 나중에 곰곰히 되씹어보니, '폼생폼사'라는 말은 매우 정확한 지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타임지를 즐겨 읽고 말고와는 상관없이, 남들 눈에 잘 띄는 차의 뒷유리 쪽에 타임지를 놓아둔 나의 행위 기저에는 일종의 천박한 자기표현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나는 이런 책 정도는 캐쥬얼하게 읽고 사는 인간이라는. 나는 많이 배웠고, 세련된 글로벌 문화에 접속하고 사는 이 땅의 1%, '무리여 가라' 외칠 수 있는 잘난 인간이라(고 여기)는 자기표현이 담겨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나는 거기에 일간 스포츠나 선데이 서울 같은 건 죽어도 안 놔뒀을 겁니다. 쓰면서도 정말 부끄럽습니다.

누구나 어느 정도 그렇겠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남들 눈에 잘나보이는 걸 좋아했습니다. 어찌 보면, 남들 눈에 잘나보이고자 하는 이 욕구가 제 삶의 많은 부분을 이끌어온 일종의 추진원동력이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공부를 하고, 학위를 얻고, 똑똑한 척 행동하고, 세련된 예술적 취향을 가다듬고, 점쟎고 예절바르게 살고, 심지어는 양심적이며 도덕적이고자 추구하는 것까지... 이런 모든 것들의 기저에는 남들 눈에 잘나보이고자 하는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피상적이기 이를데 없는 삶이라 할 수 있겠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표현이 적확할 듯 합니다. (그래도 나보다도 더 가벼운 이들을 보며 위안을 삼았었죠; 값비싼 '브랜드' 옷가지들을 문자 그대로 피상적으로 걸치고 다녀야만 만족을 느끼는 이들 등등.)

이제 좀 세월이 흐르고, '不惑'이라는 나이에 들어서고 보니, 잘나보이고자 하는 나의 욕구가 내 삶의 여정에서 나에게 끼친 영향을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때, 남들에게 잘나보이고 싶은 욕구는 때로 나에게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입히기도 했습니다. 신체와 외모에 관심이 많은 십대 때, 저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신체 일부가 약간 비정상적으로 발육했더랬습니다. 이런 사소한 것이 저로 하여금 밖으로 떨치고 나가지 못하고 안으로만 파고 들어서, 그렇지 않아도 내성적인 성격을 더욱 내성적으로 만들고, 급기야는 사춘기 말기의 염세에 빠져들게 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남들에게 육체적으로 잘나보이지 못하는 것을 십대의 나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잘나보이고 싶은 욕구가 그런 부정적인 영향만 주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실은 내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기억들이 더 많이 납니다. 나는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운 건 체르니 조금 쳐본 정도에 불과하지만, 어릴 때부터 독학해서 스무 살 쯤에는 대중적인 곡들을 꽤 잘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학부생이었을 때 국제학생 연회 등에서 몇 번 연주하게 되었고, 이때 청중이 보여준 반응에 매혹되었습니다. 내가 마음을 실어 연주하면 그것이 청중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되고 나서는, 피아노 독학에 새로운 동기가 생긴 것이죠. 그래서 이십대, 삼십대를 통해서 꾸준히 혼자 수련을 계속해서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나은 실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손가락의 기교보다는 감정을 손가락 끝으로 뿜어내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지요. 남들에게 잘나보이고 싶은 마음이 나의 음악적 소양을 키워주는 계기가 된 것이죠.

또 다른 예로, 저는 내성적 성격 탓에 일종의 무대공포증이 있었는데, 미국의 대학원에서 어쩔 수 없이 다수 청중을 상대로 발표를 해야만 하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성을 다해서 발표물과 발표 시나리오를 만들고 드디어 수십명의 학생과 교수님 앞에서 발표를 했을 때 - 그것도 불완전한 영어로 - 그때 내게 쏟아졌던 찬사는 나를 매우 고무시켰습니다. 그 첫 발표 이후론 물론 셀 수 없이 많은 발표를 하며 학교를 다녔지만, 매번 나의 발표에 귀기울여줄 청중들을 염두에 두고 기대에 부풀어 발표에 임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대학에서 하는 강의에 정성을 기울이는데, 그 주된 이유중 하나는 아마 학생들에게 잘나보이고자 하는 욕구인 것 같습니다. 실력없고 무능한 강사로 보이는 건 정말 싫으니까요. 학생들의 눈에 잘나보이고 싶기 때문에 불충실한 강의는 하지를 못합니다(물론 학생들의 마음과 그들의 이성을 '터치(touch)'해보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할지도 모릅니다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남들에게 잘나보이고 싶은 욕구가 때론 나로 하여금 아주 천박한 행동을 하게도 하고, 또 스스로가 어떤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판단이 설 때는 나를 콤플렉스에 사로잡히게 만들기도 하지만, 반면에 어떤 때에는 나에게 아주 효과적으로 동기부여를 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욕구 자체는 나의 표피의 자아와 관련있는 것이지요. 나의 피상적 인격인 자아. 이 자아 그 자체는 참된 나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의 진짜 자아는 마치 나의 피상적 자아를 버리는 것 같은 상황에서야 드러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후자를 버렸을 때에 '참된 나'가 신과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미묘하고 복잡하기도 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나의 표피의 자아, 남들의 눈에 잘나 보이고 싶은 자아의 욕심, 이런 것들이 참된 나의 정반대 편에 있어서 참된 나를 완전히 부정해 버리는 그 무엇은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배우고 있습니다. '껍데기 나'가 '참된 나'의 정반대나 부정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배우고 있습니다. '참된 나'가 '껍데기 나'를 통해 드러나게 되는 것이 신이 정해놓으신 순리와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피상적 자아가 남들의 눈에 잘나보이고 싶어하는 욕구를 무조건 부정하고 억누르고 없애 버리려 할 것이 아니라, 그런 욕구를 잘 살펴보아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길을 터주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얼마 전 산속의 급경사길을 힘겹게 자전거 페달을 밟고 올라가고 있었는데, 저 위에 한 노부부가 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산악자전거가 최신 스포츠라 그런지, 산길을 자전거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대개 놀라고 경탄하곤 합니다. 그때도 그 노부부가 경탄의 눈길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두 관객의 무언의 응원에 힘입어, 평소에는 단번에 정복하지 못하는 급경사길을 기어코 페달을 밟아 올라설 수가 있었습니다. 폼생폼사. 그러나 나의 이런 행동거지를 무어라고 심판해 버리기에 앞서,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남의 눈에 잘나보이기 위해서, 평소보다 더한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다면, 나의 잠재력을 좀 더 작동시킬 수 있다면, 이것은 껍데기 자아의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을 나의 이 웹싸이트 운영에도 적용해봅니다. 이 싸이트는 기본적으로 나 자신을 위해 만들었고 키워오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신앙수행을 위해서. 그런데, 남들의 눈에 잘나보이고 싶은 나는, 이 싸이트가 정말 훌륭한 내용들로 채워지기를 강하게 바랍니다. 훌륭한 내용, 깊이와 지혜와 타인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는 진심이 담겨 있는 내용을 채우고자 한다면 나는 안일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스님들이 용맹정진하듯이 매일을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만이라도 먹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표출시킬 수 있는 최상의 모습인 영성 수행이, 나라는 인간의 자아 껍데기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때론 천박하기도 한 '잘나보이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서 큰 힘을 얻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잘나보이고 싶어하는 분야나 차원이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낍니다. 지식, 명예, 취향, 자존심 따위가 아니라 영성수행의 치열함에 있어서 잘나보이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존재의 지고한 본질과 자아의 천박한 욕구가 함께 한 자리에 있습니다. 평화롭게.

하지만 언젠가는 이런 식으로 잘나보이고 싶어하는 마음조차 초월하기를 소망합니다.

'수행일상 2002'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