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미스

아라미스 Aramis (2003/5/17)

몇 년 전부터 의료보험 공단이 정기 건강검진 받으라고 나에게 종용을 한다. 내 몸이 중년이 되었다는 신호다. 얼마 전엔 피부에 생긴 질환 때문에 병원 가기를 아주 꺼려하지만 할 수 없이 한의원에 갔다. 진맥을 짚어 본 한의사 말씀이, 내가 체력이 저하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항변했다. 이십대 젊은 친구들과 합숙을 하며 일해도 홀로 끝까지 팔팔한 내가, 이삼년 쉬지 않고 산에 오르고 산악 자전거를 타며 체력을 키운 끝에 남들은 걸어서도 올라가기 힘든 산을 뛰어 올라가는 강인한 체력을 갖게 된 내가, 경기 남부와 서울 북부를 하루에 오가며 긴 강의 네 개를 열정적으로 해치우고 심야에 집까지 내달려 오는 내가 체력이 약하다니요. 하지만 의사는 단호했다.

곰곰히 따져보니, 스트레스도 거의 없는 내가 체력이 저하된 요인은 휴식 없는 과로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한 반년 동안 끝없이 일한 것 같다. 돈벌이 일, 나의 공부, 강의, 웹싸이트 운영, 가사, 인간관계 등등에 시간을 쏟다보면 언제나 하루가 부족하고, 한 주일이 아쉽다. 그러는 와중에 건강을 유지하고자 틈만 나면 자전거를 끌고 산으로 가서 녹초가 되어 돌아오거나, 집에서 뛰어다니는 애들 피해가며 아령을 가지고 운동한다.

남들 다 하는 이런 저런 일들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운동은 왜 그다지도 죽어라고 하는가? 한의사의 의견에 따르자면 그다지 '내 나이'에 맞지도 않는 과격한 종류의 운동을.... 가만히 생각해봤다. 내 체력이 약해졌다는 진단에 대한 나의 과민한 반응.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지속한 운동.... 조금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젊음을 - 껍데기 젊음을 - 잃고 싶지 않다는 내 자아 깊숙한 곳의 반항이었던 것 같다.

난 유난히 나이가 안 먹어 보인다는 말을 듣는다. 사십이 넘은 나를 심할 경우엔 대학생으로 오해하는 이도 아직 있다. 나의 학생들은 내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아예 나를 총각일 것이라 짐작들 한다. 사실, 언행이 유치한데다가 겉으로 차리고 다니는 꼴에도 점잖은 품위가 없다보니 더 더욱 어려보일 수 밖에. 그런데, 나의 이런 어려보임은 나의 의식 속에서 '나는 젊다'는 자기확신을 갈수록 재생산해온 한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self-fulfilling prophecy).

나의 소년 시절 우상은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 나오는 아라미스였다. 용맹한 무사이면서도 기품이 있고 지적, 미적 감각이 뛰어난 아라미스, 남성 향수 브랜드 이름, 최근 들어 늘씬한 영국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가 '철가면(Iron Mask)'이라는 영화에서 그 역으로 분하기도 했던.... 아라미스는 나의 허영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아라미스는 중년의 나이에 칼을 버리고 예수회 신부가 되어버리고....

사십이 넘은 나의 자아는 그 깊숙한 곳에서 소년기의 우상이자 청년기의 허영이었던 아라미스를 닮고자 자신의 몸을 닥달해온 것은 아니었을까. 이십대의 체력과 경쟁하는 어리석은 나. 정신과 육체 양면에서 젊음이 달아나는 것을 성숙하고 차분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달아나는 그 끈을 쥐어보려고 발버둥치는 나. 내 친구들처럼 배도 안 나오고, 숨도 안차고, 성인병도 없이 아라미스처럼, 아니 내가 머릿속에 그렸던 아라미스처럼, 내면 외면이 다 강하고 우아한 남성으로 계속 남아 있을 걸로 믿어온 나. 그리고 실은, 노년에 세속을 초월하여 신성한 존재의 뜻에 일생을 바치는 성직자 아라미스의 이미지 또한 제레미 아이언스의 이미지와 겹쳐져 있다: 그것은 이미지이고, 외면적인 것이고, 단순히 말해서, 깨끗하고 정제된 육체와 외모, 즉 껍질이다; 그럴싸하게 여윈 聖人의 이미지.

그래서, 젊음에 대한 나의 무의식적 집착의 큰 부분은 껍질에 대한 집착이었다. 심지어는 신 앞에 다가선 나의 모습 또한 그 껍질을 쓰고 있었다. 살이 찌고 식탐하는 삼총사의 다른 멤버인 포르투스가 아니라, 여위고 고행하는 아라미스의 '모습'으로 신 앞에 서고 싶었다. 그만큼, 스스로도 포착 못한 또 하나의 위선의 층(layer)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의사의 진단을 전해 들은 아내는, 그것 봐라, 잘난 척 혼자 다 하더니만 쎔통이라는 식으로 나를 조롱했다. 오로지 굳은 의지로 땀흘려 운동하고 절제 있는 생활만 하면 병원도 약도 다 필요없다는 식으로 떠벌려온 나를 맘껏 멸시했다. 분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십수만원 주고 받아온 한약 팩에 빨대를 끼워 쪽쪽 빨아마시는 처지에 얌전히 있을 수밖에. 그리고 의사의 권고대로 운동량을 좀 줄였다. 기진맥진하도록 산을 오르던 산악자전거는 일주일에 한 번만 나서고 평소에는 가벼운 자전거 하이킹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백이십 번 하던 윗몸일으키기도 구십 번 정도로 줄이기로 했다. 그리고 일을 덜 하기로 했다. 딸내미가 소꿉장 하는 옆에 앉아 이, 삼십분을 빈둥거리기도 하고, 텔레비전 뉴스를 한참 보기도 하는 등.

이제서야 조금씩 내 나이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 같다. 점점 내 몸이 늙어간다는 것에 감사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머리와 몸이 느려진다는 것에 감사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희안한 일이다, 늙는 것을 인정하며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엊그제 공교롭게도 일주일 중에 내가 강의하는 단 하루인 바로 그날이 스승의 날이었다. 네 클래스를 마치고 보니 하룻 동안 받은 선물과 꽃의 양이 엄청났다. 생전 하루에 그렇게 많은 선물을 받아본 기억은 없는 것 같다. 도저히 그 선물들을 양손에 추스리기가 어려워 가방에 쑤셔 넣고 쇼핑백을 한데 모으며 주접을 떨고 있는 나에게 한 여학생이 자신의 쇼핑백을 빌려주며 말했다. "인기폭발이네요." 총 도보 시간 삼십분에 지하철 한 번 갈아타고 버스 한 번 타야하는 늦은 밤 귀가길, 양손에 든 선물꾸러미와 꽃들로 쩔쩔매고 나니 녹초가 되어버렸다. 학생들이 고마웠다. 나의 진심이 그들의 마음에 다가 갔음을 확인한 것 또한 기뻤다. 그런데, 그들이 받아들여준 나의 진심과 나의 실체는 날씬하고 우아한 아라미스의 그것이 아니라, 골방에서 홀로 기도하는 신부 아라미스였을 것임을 이제는 안다. 양손에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스승의 날 선물을 들고 귀가하는 선생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센세이셔널 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날 밤 예외적으로 차분했다. '인기'에 들뜨지 않았으며 풍선같은 자아가 부풀지도 않았다. '나'는 아무데도 가지 않고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나이를 먹어가는 내 껍질까지 사랑하며.

'수행일상 2003'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