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 (2003/1/25)
거리에서
동냥하는 사람과 마주칠 때, 재빠른 판단으로 날렵하게 수족을 움직여
타이밍을 맞추면 그에게 몇 푼의 적선을 해줄 수 있다 (그런데 그를
일단 한 번
지나쳐 버리고 나면 되돌아가서 주기는 괜히 멋적다). 그런 푼돈이나마 적선을
해본 사람은 그 간단한 준다는 행위가 본인에게 가져다주는 곱절이 넘는
즐거움을 잘 알리라. 암튼간에 적선 행위는 자비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렇지만 우리 어머니 살아 생전, 특히 젊으셨을
때 내게 말씀하시기를, "저런(동냥하고 있는) 사람들한테 돈을
주면 게을러 진단다" 그러셨다. 미국 보수 세력이 빈민 복지 액수를
줄이자고 할 때에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논리다. 그러나 나이가 좀 들고
나서 사회학이란 것을 배우고 나니 사람의 행동이 자신이 뜻한 대로
되는 일이 참 드물고, 가난이나 범죄에 개인의 책임 부분 보다 사회
전체의 책임이 훨씬 크다는 데에 이해가 미쳤다. 그런데, 적선, 또는
자선 행위에 대한 보다 더 강력한 반대 논리가 있었다: '자선 행위는
무산층의 혁명 의식을 희석시키고자 하는 유산층의 회유자구책에 불과하다'는.
빈민층, 또는 우리의 불우이웃들 그들 자신을 위해서는 '값싼 동정심으로'
동전 몇 닢 던져주느니 보다는 그들의 의식을 일깨워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는...
이에 대해서 크리슈나무르티의 다음의
글이 적절한 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혼란이라든가, 또는
정확히 있는 그대로의 것을 의식하게 되면, 즉시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혹은 종교적인
고뇌의 해결방식을 제공하고 있는 여러 가지 당파입니다. 이런 당파의
존재가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종교적 방식이든, 우파
또는 좌파의 방식이든 어느 것이든 인간보다는 방식을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방식이 중요해진다는 것은 그 철학이나 관념이
중요해진다는 것이므로, 그런 경우 인간은 무시됩니다. 그런 사상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에 우리는 나아가서 인류를 희생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기로부터의 혁명,
범우사, 1982, p. 23).
합리적인 비젼을 가지고 앞날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대책을 추진하고 해야할 지성인에게는 매우 근시안적이고도
어리석은 행동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로선 내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뿐이다. 앞으로 할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앞에 있는 저 사람의 빈곤에 대해서 앞으로 내가 해줄지도 모르는 위대한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호주머니를 털어 해주는 적선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크리슈나무르티 말대로, 나의 이상이나 의지보다는 사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연챦게 잠깐 보게 된 텔레비전의 '제국의 아침'이라는
사극에서, 고려의 광종이 대의를 위해서 정적들을 무참하게 숙청하는데,
이에 맞서 한 불교 대사님이 진언을 한다: "대체 옥좌가 뭔데 짐승만도
못한 만행을 저지르시는 겁니까?"라고. 이에 대해 황제는 국가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이냐며 격노한다.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백성을 위하여 강건한 나라의 기틀을 잡는다는 대의를
위하여 인간의 생명을 어느 정도 희생하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안
논리. 그런 대의 추구에 대하여 나같은 소시민이 무슨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다만 내게는 광종이 겪어야 했던 그런 어려운 결단의 의무가
주어지지 않았음을 감사할 뿐...
크리슈나무르티 사부를 따르는 나로서는, 그래도
인간의 생명이 중요하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추종해온 나로서는, 그래도 인간이 중요하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학문적이거나 논리적인
차원의 믿음이 아니다. 오로지 이렇게 살고자 한다는 실천 차원의 믿음일
뿐이다. 이 믿음을 지지하는 나의 판단의 옳고 그름은 사실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이 믿음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
현재의 내 결론을 글로 제대로 표현할 능력이 내겐 없다.
그건, 내가 아직 완전히 터득하지 못했다는 확실한 증거다. 하지만,
무엇이 어찌 되었든 간에,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나의 하루를 즐겁게 만들어 준다. 곤경에 빠진 이에게 도움을 주고나면,
그가 받은 혜택이 그와 헤어지고난 나에겐 이제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에도
불구하고 이유없이 즐거워지는 것, 그것이 인간의 참된 본성임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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