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해를 보내며 (2003/12/29)
 

사회 활동도 별로 없는 주제에 연말이면 웬 모임과 행사들이 이다지도 많은지, 연일 계속되는 술자리에 자칭타칭 애주가인 나도 몸을 사릴 정도다. 그런 어지러운 나날들 속에서 겨우 하루 차분히 내 연구실에 들어앉아 공부할 수 있는 날을 맞았다. 휴- 이 안정감, 고요, 그리고 평화.

2003년 한 해는 어떠했던가 조용히 되짚어 보고 싶다. 올해 초에 신년 소망들을 열거하며, 그것들을 얼마나 이룰 수 있을 것인지 연말정산을 할 작정이기도 했었고. 근데 연초의 희망 사항들을 훑어보니 달성 실적이 완벽하지도 또 아주 저조하지도 않다. 그 희망 또는 계획들이 내 껍데기 자아와 몸뚱아리의 차원에서 우러나온 것들은 아니었고, 제딴에는 더 깊은 영적 차원과 연계가 된 사항들이라고 보아줄 수도 있기는 하겠으나, 지금 와서 다시 훑어보니 뭐랄까, 얕은 차원의 바램이 지나치게 많이 스며들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앞으로 이런 리스트 만들고 연말정산 하느니 보다는, 영적인 차원의 화두 한 마디만이라도 가슴에 새기는 것으로 새해를 시작해야 할까보다. 연말연시면 늘상 송구영신(送舊迎新)한다며 호들갑을 떠는 나같은 속물들에게는 법정 스님의 다음과 같은 한 말씀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묵은 해와 새해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것뿐입니다." 오직 부끄러울 뿐.

올해에도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참된 나를 의식하고 있었는가가 관건인데, 그런 면에서 그다지 불만스럽지는 않다. 비록 몸뚱이가 게으름을 피워서 문자와 개념을 도구로 하는 공부의 진전은 아주 느렸지만, 그걸 후회해봤자 뭐하겠나, 나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이 사회에서 사람 구실하고 먹고 사느라 바빴는데. 그래도 나의 작업공간이 생겼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고, 새해에는 좀 더 정신을 차려 공부의 진도도 나아갈 생각이다.

그래, 결국 모든 것이 축복이었고, 가르침이었으며, 덧없는 현상계에서의 한 판 연극이었다. 여전히 내가 보기에 나는 초보 수행자로서 한 걸음 한 걸음 배우며 나아가고 있다. 작년 말에 쓴 송년 '축사'를 읽어보니, 나로선 썩 잘 쓴 글이고, 올 한 해도 딱 그만큼만 배우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 '축사'를 여기에 갖다 붙인다. 아직 내 수준으로선 이 이상의 메시지를 모르겠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난 한 해 동안 받은 고통이나 회한일랑 이 쯤에서 툴툴 털어 버리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더욱 깊은 뜻을 기억해보고,
지난 한 해 동안 그것들로 인해 우리가 더 자라고 성숙하고 튼튼해지고,
그리고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음을 감사합시다.
지난 한 해 동안 주어진 기쁨과 즐거움의 기억만 가슴에 새겨 새해로 가지고 갑시다.
새해에는 평화와 사랑의 손길이 온 세상 구석구석 미치도록 기도합시다.
우리 각자가 겪는 고난들 모두가 종국에는
우리를 평화와 사랑의 손길을 뻗치는 신의 대리자로 쓰시기 위하여 주어졌음을 믿습니다.
기억하세요.
우리는 그보다 더 낮거나 작은 목적을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극히 소중합니다.
당신 안에 계신 신께 경의를 표합니다. Namaste.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