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교육 부분의 국제 교류 업무에 몸담고 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교육 엘리트와 해외의 인사들 간의 교류의 현장에서 일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되살려 쓴 글입니다.]
연구소의
'국제협력' 일을 맡게 되었을 때였다. 국제기구, 외국 학교나 연구소
등등과 연락을 주고 받으며 잡다한 국제행사를 기획, 조정하는 일이었다.
사무실에 앉은지 이틀인가 지나서 내 책상 위 전화의 장거리 통화 연결이
단절되었다. 연구소의 연구원 서열 상, 갓 들어온 신임 연구원은 아직
장거리 전화를 쓸 수 있는 군번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대한민국의
대표적 교육 연구소의 국제협력 담당 박사가 '서열상' 국제 전화를 걸
수 없다는 것. 한심했다. 워낙 동키호테 스타일인 내가 관료주의와 사이가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긴 했지만...
관료주의란 아무도 개인으로서
책임을 지지 않는 상태를 지칭한다. 행정이나 관리를 맡은 이들은 책임있는
개인으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아니, '개인'으로서 인정되지도 못한다고
해야겠지. 책임은 조직 전체가 지기로 되어 있는 것: 그 말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고. 미국 펜타곤 지하실 어딘가의
전구 하나 교체하는데 수십개의 관련부서 결재가 필요하다고 한다. 관리
한 명이 자신의 책임으로 그 전구 하나 갈아끼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이성과 합리를 기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더 잘 해보고자 만든 행정조직이
일단 관료주의의 늪에 빠져버리면 - 대개 그렇게 되지만 - 이러한 무책임의
만연 현상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극단적 예로, 미군 장갑차에 두 꽃다운
소녀가 무참하게 깔려 사망했지만 미군 관료조직에는 책임지는 자가
없다. 인간이 만든 시스템이 참으로 비인간적이다. '큐브'라는 영화의
살인큐브들이 그런 비인간적인 관료주의를 상징적으로 잘 묘사해준다.
테리 콜 휘테이커(Terry Cole-Whittaker)라는 미국의 유명한 영성(靈性)
컨설턴트가, 자신은 활기에 찬 관료를 한 명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한
것에 매우 동감한다. 내가 복지부동의 관료 조직들(대표적으로 대한민국
중앙정부)과 상대하여 국제협력 일을 했던 기간의 길이와, 관료주의의
무책임성과 비인간성에 대하여 갖게된 나의 확신의 강도는 정확하게
정비례했다.
소설가 이윤기 선생의 말이다: "무슨 무슨 상 시상식장이나 기념식장 갈 때마다 경험한다. 이런 예식에서 축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적다. 축사는 지위 높은 사람에게 차례가 가는
것이 보통인데 그런 자리에 독창적인 인간이 앉을 확률은 매우 낮다.
높은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만 이건 '피터의 법칙'이라는 것이지 내 말이
아니다. 그래서 독창적인 축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마나, 들으나마나다."
(중앙일보, 2002.12.7)
나는 정말이지 '환영사,' '축사'를 싫어한다(오죽하면,
고교졸업 이후로는 내 자신의 졸업식에 참석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싫어하는 환영사를 국제행사용으로 영문으로 여러 번 썼다. 환영사는
관료주의의 추한 꽃이다. 내가 쓴 영문 환영사를 고위 관리가 지루한
톤으로 행사장에서 읽는 것을 듣고 앉아있는 것처럼 따분한 일도 없다.
국제회의라는 것도 그 환영사 만큼이나 피상적인 절차에 불과하다. 그
찬란한 껍질이 숨기고 있는 깊숙한 내막 속에는 행사에 돈 댄 사람의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의도가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핵심의 의도가
아름답지 않은데 행사가 아름다워지기는 지극히 힘든 일. 나를 도와
행사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일해준 헌신적인 순수한 젊은이들만이
그런 아름답지 않은 의도가 노골적으로 표면화되는 것을 막아준 천사들이었다.
한국의 관료주의와 '국제'회의라는 것... 함께 가지 않는다. 따로 논다.
간결한 나의 결론이다.
본질을 생각해본다. 국제협력이나 국제회의의
본질. '자유로운 소통'이 본질일 것이다. 그로부터 태어나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 또한 그 본질일 것이다. 내가 '국제 물'에 몸담고
일할 때 우리 나라의 관료조직들이 국제행사에 참여하는 동기에서 그러한 본질의
힌트만이라도 목격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나 다름없이 관료주의의 지루한 꿈틀거림인 대규모 국제회의가 벌어지고
있었고, 나는 그 회의가 성공적으로 별탈없이 진행되도록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관리하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상이한 문화들과 국가들
사이의 교류의 본질을 목격하는 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 행사의 주최인 국제학회의 학회장과 그의 조력자 교수인 두 여성(외국인들)이
한국 고위관리의 '환영사'에 대한 화답으로 회의장 앞으로 나와 무반주로
노래를 부른 일이었다. 국제학회의 개회식에서 느닷없이 쌩소리로 노래를
부르다니! 점쟎은 학자와 관리들이 뻣뻣한 목을 주체하기
힘들어 하며 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교류와 소통의 아름다움을 음성으로
노래하는 그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국제교류의 본질적 가치를
목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며칠 간 지속된 그 회의를 통해
그 두 여성들과 가깝게 대화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우리 나라의 관료조직들이
그런 국제행사에 대해 품고 있는 아름답지 않은 의도와 그 두 사람의
국제교류에 대한
열정을 적나라하게 대조해볼 수가 있었다. 아, 이 사람들은 정말로 세상의
여러 나라, 특히 한국의 교육자들과 이야기와 지혜를 나누기를 갈망하고
있구나! 지혜의 나눔, 바로 그것이 본질이었다. 원래는 고귀했었을 본질의
구현을 위하여 만들어진 한국의 관료주의적 조직들은 그런 본질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지 오래인데....
어쩌면 교육 연구, 정부 조직
등등이 그다지 관료주의적이지만 않았어도, 나는 그 '물'에서 조금 더
놀았을런지도 모르겠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수밖에. 내 조국의
'국제 물'의 관료주의가 보여주는 본질의 철저한 망각. 이것을 나는
나 개인의 삶에 비추어 본다. 나 자신의 관료주의는 무엇일까? 내가
발견하고 선택한 '본질'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고안된
여러 조력 장치들, 그것이 형식화되고 그 자체의 존속만을 위해 기능하고
있을 때, 그것이 내 개인 레벨의 관료주의, 또는 '껍질'의 발흥이라고
하겠다. 지금 나에게 얼마나 많은 껍질이 붙어있나? 돈 그 자체에 대한
탐욕 때문에 하는 돈벌이, 공부와 일을 벗어나는 컴퓨터에 대한 지나친
집착, 효율적 정보 관리와 별 관계없는 책과 파일의 정리에 대한 과도한
몰두, 나의 내적 성숙이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앞지르는 책 읽기와 책
모으기, 내 내면에 대한 솔직한 바라봄의 절차가 생략된 형식적인 친절과
선행, 습관적으로 하게 되는 기도나 명상, 일주일에 한 번이라는 내가
정한 틀에 맞추기 위해서 이 싸이트를 업데이트하려고 별 쓰잘데 없는
소재를 가지고 지금처럼 글을 끄적거리는 것.....
껍질과 본질이
따로 놀지 않는 인간이고 싶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