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 (2003/12/3)
 

그간 머리 싸매고 있던 논문도 엊그제 완성시켜 보내버렸고, 쌓여 있던 잡무도 다 처리해버리고는 어제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멀리서 찾아온 친구에게 술을 사줬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 대충 밥 차려 먹고는 아내와 둘째 딸에게 안녕하고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출근길에 오랜만에 빙 돌아서 호반과 산에 들렀다 올 심산으로 물통도 싣고서 나섰다. 초겨울의 바람이 모처럼 차갑게 내 얼굴을 때리는 오전 나절의 한가함.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이면 도로의 파종한 흔적으로 어수선한 벌판 사이를 지나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고 한 삼십 분 달렸더니 등짝에 땀이 흐를만치 덥다. 백운호수를 한 바퀴 돌며 쓸쓸한 물빛을 들여 마시다가 산쪽으로 길을 잡고 가파른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포장도로가 끊긴 곳부터는 기어를 더욱 저단으로 밀어 넣고 길에 흩어져 있는 자갈들을 피하며 산을 올랐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곳, 갈대가 늘어서 있는 곳, 그리고 폭이 좁은 냇물위로 비스듬한 12월의 햇살이 비추고 있는 둑길을 지나 산속으로 더욱 더 깊숙이 들어가고 있노라면 주위에 사람이 한 명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가파른 길을 오르느라 내 몸에서 나오는 거친 숨소리와 저 멀리 고가도로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만 들릴 뿐. 오늘의 목적지인 산중턱 숲속의 빈터에 도착했다.

특별히 아름답거나 눈에 확 띄는 장소는 아니지만, 한 켠으로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고, 빈터를 둘러싸고 여러 종류의 활엽수들이 서있으며, 한쪽 구석에는 마치 제단처럼 육중한 바위 하나가 자리잡고 있는 그 빈터를 나는 사색의 장소로 애용해왔다. 숨을 겨우 돌리고 차가운 물을 마시니 정신이 번쩍 든다. 그 제단과 같은 이끼 낀 바위 위에 걸터 앉아 보리수 밑에서 득도하신 석가모니 흉내를 내본다. 이제 내 귓전을 두드리는 것은 물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바람소리 뿐. 주변에 아무도 없음이 참으로 나를 평안하게 해준다. 사람을 좇으면서도 이렇듯 사람 없는 곳이 종종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 중생제도 비스름한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으면서도 나 홀로 떨어져서 깊은 산속에 앉아 있고 싶은 이유는 무얼까? ..... 그저 물소리 바람소리 들으며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 그간 쌓인 모든 피로와 심지어는 어제 들이마신 술의 주독까지 죄다 싹 씻겨내려가는 것만 같다. 언제나 내가 미망에 사로잡혀 정신을 못 차릴 때면 내 이마에 싸늘한 바람을 보내주시는 신을 생각하며 눈을 감고 가만히 있노라면, 또 다시 내 이마에 시원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이 순간 내가 해야할 일이 있다면, 그건 오직 미소 짓는 것 뿐. 이 순간을 철저히 살고 있는 지금 내게는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고, 그 어떤 일도 할 필요가 없다. 주님, 한 말씀만 해주소서 라고 예전에 곧잘 하던 기도마저 지금은 하지 않는다. 차가운 바위와 정겨운 물소리와 서늘한 바람과 이 빈터의 교교한 정적이 모두 감사할 따름이다.

속세에 살며 쉽사리 풍진에 찌들게 되는 우리는 가끔씩이나마 그 때를 씻어내고 몸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 아무도 없는 산속에 홀로 들어가 있을 필요가 있는가 보다. 나밖에 없는 조용한 산은 깊은 평화를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