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

너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가 있거든... (2003/3/1)

첫애가 태어난지 몇 달 되기도 전, 그애를 데리고 미국에서 장거리 여행을 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쌀쌀한 늦가을 북미의 황량한 고속도로에는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애기를 뒷좌석에 동여매고 이런저런 사연으로 싼 값에 렌트하게 된 거대한 8기통 짜리 미제 차를 몰고 가던 우리 부부는 한 고속도로 휴게소에 차를 멈췄습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는 그 순간, 둘 다 순간적인 착오로 열쇠를 안에 두고 문은 잠근 채 내려버린 것이었습니다. 애기는 차 안에 둔 채로! 그 후로 일어난 일은 악몽과도 같았습니다. 어쨌든 저는 고속도로 순찰차와 차량 자물쇠 수리공까지 동원해서 차문을 따고자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요, 애는 뒷자리에 누워서 끝없이 울고 있는 와중에 - 차가 하도 방음이 잘 되어 있어서 그 우는 목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저는 추위보다 차 안의 산소량이 얼마나 지속될지가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찰도 수리공도 그 차문을 따는 데 실패했을 때 저는 수리공에게 해머를 달라고 했습니다. 유리창을 깨려구요. 그것도 위험한 일이었죠, 그러다 유리가 애에게 튀기라도 하면...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빨간 체로키 지프 차를 몰고 나타난 빨간 자켓을 입은 금발의 사나이가 저와 수리공을 제치고 차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는 스크루드라이버 한 개를 가지고, 몇 시간 동안 꿈쩍않던 차문을 간단하게 열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 시간 동안 찬 비를 맞고 서있던 저는 온 몸을 덜덜 떨며 아기를 꺼내 안고는 휴게소 안으로 들어가 아내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울다 지친 아기는 엄마 품안에서 겨우 진정하고 있었고, 아내는 몇 시간의 긴장 끝의 안도감으로 흐느끼고 있었으며, 저는 여전히 젖은 몸을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그 금발의 멋진 사내는 주위에 대고 외쳤습니다. 어디 술 가진 사람 없느냐고, 이 떨고 있는 친구에게 술 한 모금 멕여야겠다며.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차문을 열지도 못하고선 출동비를 요구하려던 수리공과 고속도로 순찰대에게 직접 뛰어나가 그런 요구의 부당함을 따지고 모두 돌려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미소를 지으며 그야말로 멋지게, 텔레비젼에 나오는 정의의 용사처럼 자신의 빨간 차로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에게로 내달았습니다. 무조건 그의 팔을 잡고 졸랐지요. 성함과 연락처라도 주고 가시라고. 그는 극구 거부했지만, 저의 간곡한 애청에 못이겨 결국 주소 하나만 달랑 주고 떠나버렸습니다.

그 사나이 덕분에 무사하게 위기를 넘기고, 차 유리도 박살내지 않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우리는, 미술 하는 아내가 정성을 기울여 만든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감사 카드를 그에게 부쳤습니다. 그 카드는 천사의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당시 무신론자였던 저에게도 그는 마치 천사와 같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이지만, 그 사내도 사례하고자 하는 저에게 이 말을 했더랬습니다: 당신도 다음 번에 곤경에 빠진 이를 만나게 되면, 내가 당신에게 한 것과 똑같이 도움을 주라고.

저는 지금도 그 사람을 떠올리면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분명히 세상은 살만 한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그가 제게 남긴 그 말씀을 따르고자 노력합니다. 항상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어도.

얼마 전이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큰길가를 달리고 있었는데, 승용차 한 대가 차들이 씽씽 다니는 위험한 교차로에서 멈춰서서 꼼짝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차를 지나쳐 갔던 저는 자전거를 되돌려서, 낭패한 얼굴로 서있는 운전자에게 다가갔습니다. 운전 경력 이십 여년인 저로서는 당장 차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되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그 남자에게 운전대를 잡으라고 하고 저는 차 후미에서 밀었습니다. 바로 옆에서는 버스와 트럭들이 쌩쌩 내달리고 있었구요. 그렇게 이삼십여 미터를 밀어서 차를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제 이마에는 땀방울이 잔뜩 맺혔습니다. 운전자인 젊은 남자는 고맙다는 말을 어색하게 한 뒤 재빠르게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며 핸드폰을 꺼내들더군요. '아, 이 사람이 내가 무슨 보상을 바라는 줄 알고 날 떼어놓으려는 거로구나' 라는 것을 눈치 챈 저는 '수고하십쇼' 한 마디하고 얼른 그곳을 떠나버렸습니다. 물론 무엇을 바라고 도와준 것은 아니었으나, 나를 의심하고 회피하던 그의 눈길은 나를 조금 슬프게 하였습니다. 이와 비슷하지만 역(逆)의 경우를 진솔하게 쓴 장영희 교수의 글을 아래에 퍼다 옮겨 봅니다.

우리 시대의 슬픈 이야기

얼마 전 어느 문학잡지 편집실에 있는 노처녀 제자 영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이번호 잡지가 나오고 나서 혼자서 기차여행을 하기로 했다. 춘천행 기차를 타고 새 봄기운이 도는 바깥 경치를 보기 위해 창가에 앉았다. 기차가 막 떠나려는데 멋진 바리톤 목소리가 들렸다. "이 자리 비었습니까?" 서른네댓쯤 됐을까, 캐주얼 복장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앉으세요." 짐짓 무심한 듯 대답했으나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그 남자는 지성적이면서도 따뜻한 인상의, 영미의 이상형이었다. 그 남자는 앉더니 가방에서 영미가 만들고 있는 그 문학잡지를 꺼냈다. 자연스럽게 영미와 그 남자는 대화를 시작했고, 영미는 그가 작은 극단의 단장이며 아직 미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영미는 문학에 관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자연스러운 매너에 절로 끌려 자신도 모르게 낭만적인 꿈을 꾸게 됐다. "이 여행이야말로 내 인생의 기점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 남자도 영미에게 호감을 갖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얘기 도중 그 남자가 가방에서 오렌지 주스 한 병을 꺼내 영미에게 권했다. 무심히 받아서 뚜껑을 열려는 순간 영미는 문득 생각했다. '혹시 이 병에 수면제라도 탔다면? 이 사람의 진짜 직업이 납치꾼이라면?' 의심이 샘솟았고, 영미의 아름다운 낭만적 꿈은 그 자리에서 산산이 부서져 찬란한 봄볕 속으로 사라졌다.

지난주에 시내에서 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잡는데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다른 사람처럼 이리저리 뛸 수도 없는 처지라 합승하기도 쉽지 않았다. 반시간 이상을 기다리는데 어깨에 멘 가방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그때 흰색 승용차 하나가 내 앞에 섰다. 말쑥하게 차린 청년 하나가 나오더니 활짝 웃으며 "택시 잡으려고 서 계신 거예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요…." 의심쩍은 목소리로 내가 대답하니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이건 저 주시고요"하면서 청년은 내 어깨에서 가방을 빼앗아 가려는 것이었다. "안돼요!" 나는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며 가방끈을 단단히 잡았다. 목발을 짚고 있으니 사람을 녹록하게 본 모양이었다. "아, 사실, 택시를 잡으려는 게 아니라 누구를 기다리고 있거든요. 동생이 곧 데리러 올 거예요." 두려움에 거짓말하는 목소리까지 떨려 나왔다. "정말이세요?" 실망하는 빛을 띠며 청년이 물었다. "전 여기서 봬서 너무 반가웠고 어차피 저도 신촌 쪽으로 가니까 가면서 얘기하고 싶었는데." 신촌이라고? 어떻게 내가 신촌 쪽으로 가는 줄 알까? "근데 선생님, 요새 학교는 어때요? 졸업하고 한번도 못 갔어요."

그제야 나는 그 청년이 나의 제자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름은 기억할 수 없으나 수업만 끝나면 내 책가방을 사무실까지 옮겨다 주던 학생이었다. 아마 당연히 내가 자기를 기억하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학교? 그냥 다 잘… 그런데 택시를 기다…." 차마 납치범이나 도둑인 줄 알고 태워준다는 것을 거절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30~40분을 더 기다려서야 택시를 잡아 집에 올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쉽사리 잠들 수 없었다. 추운데 너무 오래 서 있어서 몸이 몹시 피곤한 것도 있었지만, 아무도 신뢰할 수 없어 낭만도 친교도 불가능해진 세태가 슬퍼서였는지도 모른다.

- 장영희(서강대교수·영문학, 중앙일보 2003.2.22)

제 짐작으론, 장교수님은 아마 이 다음부터는,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모르는 이의 친절에 마음을 열 것 같습니다. 이분을 위해서는 값진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타인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서, 타인에게서 도움을 받고, 또 낯선 타인에게 무조건적인 도움을 주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한 편 소개합니다. 제 싸이트에 소개되어 있는 마사 베크의 '아담을 기다리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저자 베크가 둘째인 아담을 임신하고 남편도 출장 갔을 때, 극심한 입덧과 육아와 과다한 학업 부담으로 거의 쓰러지기 직전인 상태였었는데, 디이더라는 한 번쯤 마주친 적이 있던 여인이 친구와 함께 자신의 집에 찾아와서 큰 도움을 주었답니다. 디이더라는 여인은, 자신이 심신이 피폐해져서 병원에 누워서 울고만 있을 때의 놀라운 경험을 베크에게 들려줍니다. 그때, 병원에서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갈색 피부의 이민족 간호보조원이,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씻겨주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계속 정성스레 위안을 해줬다는 것입니다. 그 간호보조원의 간호로 큰 위안을 받고 디이더는 소생할 힘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디이더는 한손을 내밀어 내 손 위에 놓았다. "그래서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거야. 내겐 갚아야 할 빚이 있어." 그때쯤에는 나는 폭포처럼 눈물을 쏟고 있었다 .... 불행한 것은, 우리들이 다 우리의 진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거나, 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기간만큼 어머니와 함께 있는 행운을 누리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다행한 것은, 어머니는 없다 하더라도 어머니처럼 보살펴주는 사람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 불유쾌하고 불편한 지구상에서 모든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노릇을 해주는 이들은 넉넉히 존재한다. 우리가 어리석지 않고 어디를 보아야 할지를 안다면 우리는 항상 그이들을 찾을 수 있다.

물론 내가 아담을 가지고 있는 동안 나는 어디를 보아야 할지 몰랐지만 많은 보살핌을 받았다. 그 힘든 시기 내내 나는 어머니 노릇을 해줄 사람을 찾아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나타났을 때에도 실제로 그들을 물리치려 했었다. 도움을 받으려면 방어적인 태도를 버려야 하는데, 학문적 성취에만 몰두해온 7년 동안에 나의 성격에는 거의 방어적인 태도만 남은 것 같았다. 시빌을 우리집으로 올라오게 하고 다음날 디이더와 함께 다시 오게 만든 - 그리고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 힘이 무엇이었든간에 그것은 내가 그들을 돌려보내지 못할 만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힘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 힘든 해가 지난 뒤에 한동안 나는 그것에 뜻밖의 행운, 복, 하느님, 운명 등의 이름을 붙이려고 해보았다.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나는, 그 당시에도, 아담이 함께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담이 시빌과 디이더를 선택해서 우리 아파트에 나타나게 했음이 밝혀지더라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가 할 만한 일인 것 같으니까."

- 아담을 기다리며, pp. 68-69

그 차를 밀어준 일이 있은 뒤 어느 날, 저는 또 자전거를 타고 이번에는 논밭 옆길을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늘 다니는 그 길 옆의 한 2미터 쯤 아래에는 논밭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 아래의 논두렁에 한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가지고 서계시다가 저에게 손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논두렁에 왜 자전거를 가지고 내려가 계실꼬... 하는 궁금한 마음을 가지고 할아버지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말씀인 즉슨, 제가 서있던 바로 그길로 자전거를 몰고 가시다가, 그만 저 아래 논두렁으로 굴러떨어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와달라는 노인을 그냥 지나칠 수야 없는 일. 저는 길가의 둑 위로 미끄러져 내려갔습니다. 할아버지의 자초지정을 듣고, 부상당한 데는 없으신가 살펴본 뒤, 자전거를 위로 옮겨 드리기로 했습니다. 자전거를 두 팔로 앞으로 들어올리고는, 흙으로 된 경사를 발로 푹푹 찍어 밟으며 올라갔습니다. 아주 힘든 일이었으나, 쓰러지지 않고 간신히 그 무거운 짐 싣는 자전거를 올려다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처럼 저의 튼튼한 다리가 자랑스러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겨우 따라 올라오신 할아버지는 연신 고맙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조심해 가시라며 날렵한 제 자전거에 올라타 휙 떠났습니다. 빨간 체로키 지프 차를 타고 휙 떠나던 그 금발의 사나이가 생각났습니다. 휙 떠날 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자기 만화화(漫畵化)는 유치한 심리의 발현일지 몰라도, 노인에게 도움을 준 것은 당연히 잘한 일이었지요.

타인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 그리고 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고 움츠리는 것, 이 두가지는 언제나 후회를 수반합니다. 도움을 받을 때나 줄 때나,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두려움을 이겨야만 하지요. 물론, 그런 열린 자세가 나에게 손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곳에 그런 손해가 너무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데에 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런 곳을 치유할 책임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타인의 손길이 보상을 요구하는 영리추구 행위여서 내가 손해를 입을 수도 있고 또, 나의 애정의 손길이 타인의 눈에는 보상을 요구하는 영리추구 행위로 보여 내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지만, 그런 손해와 상처 따위는 대수롭지 않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내 본질인 사랑으로 그 순간을 살았는가 하는 것이겠지요.

'수행일상 2003'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