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家庭) (2003/8/31)
 

해가 지고 있던 저녁 무렵 귀가 길에 멀리서 우리 아파트를 바라보니 집집마다 따스한 노오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머니들이 저녁 식탁을 준비하고 있는 시간. 지극히 평범한 일상. 집 안에 있는 사람들로선 새삼 어떤 특별함도 감지할 수 없을만큼 평범한 하루 중의 한 순간. 그러나 먼 발치에 떨어져서 바라보는 이는 그 노오란 불빛에서 가정, 가족, 행복, 사랑, 평화 이러한 것들을 느끼고 또, 본다. 가정의 저 불빛은 참 따스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관찰자의 시각과는 상관없이, 그렇듯 따스하고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하는 불빛 속에 실제로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따스함이나 아름다움 같은 것은 조금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기 십상이리라. 아이들은 텔레비젼을 보거나 숙제를 하고 있고, 귀가한 아빠는 발을 씻고 있고, 엄마는 저녁상을 차리고 있는 일상, 매일매일 끝없는 것처럼 되풀이 되는 그 일상이 왜 새삼 특별하게 따스하거나 특별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지겠는가. 그냥 먼발치의 관찰자나 지레 짐작 그렇게 느낄 뿐.

가정이란 무엇인가? 가정을 가진 이들에게는 지나치게 일상적이어서 구태의연하게까지 느껴지기도 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닐까. 가정이 무엇이 그리 아름다운가. 어느 가정이고 파고 들어가 보면, 대개는 비밀과 탐욕과 갈등과 증오 따위가 벽장 뒤에 은밀하게 감춰진 곰팡이처럼 뿌리를 뻗고 있지 않을까. '대미지(Damage)'라는 영국 영화에서도 그려지듯이, 가정이란, 특히 완벽하게 보이는 가정일수록, 극히 미약한 충격에도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버릴 만큼 약하디 약한 결합체 아니던가. 부부 간의 불화, 아버지의 전횡, 어머니의 간섭, 형제간의 알력, 친척과의 갈등 등등으로 언제나 시끌시끌 골치 거리로 가득한 가정. 그런 가정이 바깥의 관찰자가 보듯 그렇게 따스하고 아름답기만한 곳인가?

어찌 됐든 간에, 먼 발치에서 바라본 그런 불빛을 퍼뜨리는 가정을 가지고 있지 못한 이들도 세상에는 많다. 아직 가정을 못 이룬 이들, 그리고 이미 가정을 다 가져보았으나, 그 가정의 생명이 소진하여 다 떠나보낸 이들 - 나의 아버지와 같이. 그런 사람들에게는 노오란 불빛을 퍼뜨리는 가정이란 것이 한층 더 따스하고 아름다워 보일런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불화와 증오로 덜덜 떨고 있는 가정마저도 그런 이들의 눈에는 따스한 황금빛을 발하는 부러움의 대상일 수도 있다 - 삶의 상처를 치유해줄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곳으로.

관찰자의 눈에는 천국처럼 보이는 것이 그 안에 살고 있는 이에게는 지옥일 수도 있다. 어떤 이에게는 지옥처럼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 관찰자의 눈에는 천국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한 마디로, 가정이란 이러한 것이고 저러한 곳이며, 이러저러하여야 한다는 논의는 별 의미가 없다. 가정을 사회 제도(social institution)로 다루는 분석적 시각과 가정을 고래(古來)의 종교적 유산으로 수호하고자 하는 굳건한 태도 양자 사이의 분리와 대립 그 자체가 가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식자층에는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넌더리가 만연하고, 보수적 종교집단은 개인에 우선한 성스러운 가정을 수호하기 위한 기치를 드높이고 있는 분열된 현대의 사회상은 오늘날 가정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간결히 보여주고 있고, 동시에 그 위기를 강화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정의 총체적 위기를 감지해보고자 한다면, 열한 시 경의 서울 시내를 배회해 보면 된다. 매일 밤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단란주점, 비즈니스 클럽, 룸싸롱, 안마시술소... 그리고 학원, 학원들... 귀가를 거부하는 각계각층의 어른들과 아이들로 넘쳐 흐르는 저자거리. 예전같으면 오밤중일 열한시에 웬 지하철은 그렇게도 붐비는지...

나는 이런 도식을 본다: 경제성장추구 - 일중독사회 - 남편을 일에 빼앗긴 가정 - 남편과의 일생을 그려볼 꿈을 버린 아내 - 자식에게 전이된 일생의 기대 - 자식의 교육에 대한 과도한 투자 - 지나친 교육경쟁 - 사교육 시장의 비대화 - 더더욱 극심화된 교육 투자 경쟁 - 사교육비 충당을 위한 더 많은 부부의 희생 - 더 많이 일해야만 하는 남편 - 더욱 더 결단나고 있는 가정...

가정이 더 이상 '쿨(cool)'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나라도 지금 이십대라면 결혼해서 아이를 나을 생각이 안 들겠다.

허나, 치유의 공간으로서 가정이 회복되지 않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에게 어떤 대안이 있을 수 있을까 회의해 본다. 사실 난 대안을 찾고 있지 않다. 단지, 오래된 인류의 유산인 가정의 기존의 운영방식을 대체할 새로운 방식과 그것이 기초하여야 할 영성을 모색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한 영성은 가정을 꾸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에서 우러난 지혜를 제공해줄 수 있어야 할 텐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나 자신 잘 하고 있지도 못하면서, 신앙의 길로 들어선 이후 어찌어찌하여 여러 친구와 지인들의 '가정 상담'에 응하였고, 또 그런 과정 속에서 이집 저집의 내밀한 고통을 숱하게 목격하며 그 해결점이 어디에 있을지 찾아왔다. 이런 나의 모색을 비웃기라도 하듯, 요즘 다시 끄집어내어 읽고 있는 무묘앙 에오는 가정생활이 개인의 영적 수행에 털끝만큼의 도움도 주지 않는다고 일갈해댄다. (허나 완벽한 고요와 무(無)에 대한 그의 선언을 부정할 수 없어 계속 붙잡고 읽고 있다.) 그래, 에오의 말이 맞을 것 같다. 가정과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다만, 나라는 특수 개체가, 이번 생애에 동반자가 된 귀한 인연을 가진 제 식구들과 다 함께 빛 속으로 걸어들어가고픈 욕망을 갖고 있는 것일 뿐. 그리고 나의 그런 욕망을 실현할 세련되고 사려깊은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 내 주변의 치유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심증이 있을 뿐. 그래서, 내 집 창문이 노오란 불빛을 퍼뜨리는 저녁 시간, 식탁에 아내와 두 아이와 모여 앉아 있는 그 순간을 결코 무심코 보내지 않고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