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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는 제
손으로 홀로 벌어 먹고 사는 자다. 고정급이 없고 조직의 보호가
없다. 먹고 살기 쉽지 않다. 그러나 자유롭다. 사진작가 강운구는 이렇게
썼다: "나에게는 황홀한 꼬리표가 붙어 있다. '프리랜서'라는.
그러나 그것은 그럴싸하기만 할 뿐 실속이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의 자유는 황홀하다. 그러나 실속은 없다. 속박이 싫어 '프리'를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 나에게 한 선배가 취직을 종용했다. 한 대학에
좋은 자리가 하나 났는데 찔러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대뜸 정중히 거절했다.
어떤 이들은 돈까지 상납하며 비집고 들어가려고 목을 매는 대학 교수
자리. 나는 학업 마치고 귀국한 이후로 한 번도 지원해본 적이 없다.
다행히 그런 나를 선배는 이해해주었다. 그러나 다음 날 선배는 또 내게
전화를 걸어 다시 한 번 지원해보라고 종용을 했다. 이번엔 나도, 한
번 생각해보겠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한 번 생각해봤다.
지원했다가 안되면 본전이지만, 만약 되면... 그래, 진짜 취직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프리'가 된 이후로는 여직껏 한 번도 교수직을 옵션으로
고려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 갑자기 예상하고 숙고하기가
영 어려웠다.
고민하다가 교수인 길벗 한 분께 상담을 요청했다:
교수가 되어서도 하고 싶은 거 하며 살 수 있느냐고. 나를 이해하는
길벗의 응답은 긍정적이었다. 실은 몇 주 전엔가 교수인 다른 벗으로부터도
대학에 자리 잡으라는 권고를 받은 일도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한 번 찔러보지 뭐, 그랬다가 혹시 취직이 돼버리면 그것도 한
번 해보는 거지 뭐, 그러다가 싫으면 그만 두면 되쟎아.' 그러나 대한민국의
교수 자리라는 게 어디 한 번 들어갔다가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인가?
그 자리가 보장하는 수많은 권익 때문에 말야, 김용옥 빼놓고는...
하여튼 지원해보기로 결심하고 지원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되든 안되든
일단 결정한 일이므로 최선을 다해서 해봐야 될 것 아닌가.
교수직에
지원하려면 제출해야할 증빙 서류가 이것저것 꽤 많다. 그런데 나는
바로 몇 달 전에 내 물건 죄다 싣고 이 오피스텔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갖고 있던 학업 관련 서류들이 거대한 책들과 파일 더미 속에서 어느
구석에 들어가 쳐박혀 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가 않는다. 한 나절을
겨우 뒤져서 학위와 성적 기록들을 찾아냈다. 대부분 잘 보관이 되어
있었는데, 미국에서의 석사 과정 성적기록만 찾을 수가 없다. 내
생애의 모든 성적표 중 가장 화려했던 석사 과정 성적표가! 그놈을 구하느라 도대체
몇 날 몇 일을 땀을 뺐는지 모른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인터넷과 팩스
등으로 성적표를 신청은 했는데, 지원 마감일까지 도착하지 않아서 할
수 없이 과거 기록에 의존해서 사제(私制) 성적표를 손수 만들어 '한
번만 봐주십쇼'하고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이런 저런 서류들도
제대로 갖추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비됐다. 특히 미국의 지도교수님
추천서는 지원서 제출 마감일 바로 전 날에 배달이 되었고.
이런
모든 과정들을 몇 주일인가 겪으며 취직이라는 '중대사'에 대하여
반응하는 나 자신의 내면을 일일이 응시해보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
처음에는, 가당치 않게 건방지게 대학에 자리잡으라는 친지들의 조언에
콧방귀만 뀌고 있더니만, 한 번 마음이 돌아서고 나서는 마치 대학에
자리잡는 게 나의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듯이 온갖 정신적 에너지를
지원 작업에 몰두시키게 되어버린 것이다. 지난 수년 간 수행 한답시고
틀어박혀 있느라 내 전공 영역에 대한 연구 실적이 거의 제로인
점이 영 마음에 걸려, 삼년 전에 박사 논문을 가지고 매만졌었던 논문
하나를 갑자기 다시 손을 봐서 미국의 학술지에 부치기도 했다.
그간 '실적'을 위한 연구라는 것이 얼마나 학자의 본질에 위배되는 것인가
짐짓 잘난 척 비판하며, 웬만큼 내 구미를 돋구지 못하는 소재에 대해선
논문 쓸 것을 철저히 거부하더니만, 이제는 이판사판, 오직 영어권의
유명 저널에 논문이 실린다는 것이 의미하는 '실적'으로서의 강력한
효과 하나 노려서 밤을 밝혀 논문을 완성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지도교수께 연락이 안되고 성적표 신청이 접수가 안돼 노심초사하기까지
했다. 그러고 있는 나의 모습을 나는 매 순간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대학교수임용지원 과정에 대한 명상' 프로그램이었다고나 할까.
지난
세월 입산수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혼자 틀어박혀 수행한다고
앉아있던 내공이 약간은 쌓인 것 같다. 다행히 지원서류 준비 초기의
어수선함이 가라앉고 나니, 그 어수선함에 반응하던 나의 표면적 자아에
대한 관찰을 마치고, 몸과 마음이 여느 때와 다를 바없이 차분하고 평화로워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원 마감일까지 석사 성적표가 도착하지 않았어도
그것이 조금도 걱정스럽지 않았다. 자기 소개서를 작문하면서 현재의
나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보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지도교수와
전 직장 보스의 추천서를 받아보고는, 두 분이 나를 위하여 글로
써준 엄청난 찬사에 당황스럽기는 했어도 특별히 기쁘고 의기양양하지도
않았다. 모든 일이 그럴만 하니 일어난 것이리라는 수용과 감사의 자세를
갖고 매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최선을 다했을 따름이다.
결국, 지원서류 제출 마감일이 다가올 때가 되어선 나는 매우 평화롭고
또 내 삶의 본래 의무에 충실한 나날을 만들고 있었다. 취직하느냐 마느냐
하는 일상의 중대사는 결코 중대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축복의 하루를 완전하게 가득 채워 살고, 그 결과가 어찌돼든
그것은 대자대비하신 신께서 알아서 이끌어 주실 일이니, 특정 결과를
기대하거나 선호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난 주어지는 대로 기쁘게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대학에 지원했다는 얘기를 들은 벗이 포장마차에서
소줏잔을 채우며 내게 말했다. 자신은 대학생활 4년 동안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 스승 한 분 못 찾았었다며, 네가 꼭 대학 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필요한 참스승이 되기를 바란다고... 그래, 그것도 참 좋은 얘기지.
그런데 나는 왜 교수직에 지원을 했던가? 참스승에 대한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첫째 이유는 돈이었다. 황야의 이리마냥 손에 잡히는
대로 일하고 벌어서 가족 부양하는 삶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에. 매달 꼬박꼬박 통장으로 월급이 들어온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경험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프리랜서라는 '황홀한 꼬리표'보다도
몇 백만원의 수입이 더 황홀할 듯이 여겨지고...
돈 때문에 교수직
지원했다는 것, 조금도 부끄럽지는 않지만 - 학자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 그 돈에 내가 의존하는 그 정도 만큼 나는 자유로부터 멀어지리라는
것을 쉽사리 예상할 수가 있다. 허나, 이런 예상 역시 지금 이 순간을
철저히 사는 것과는 동떨어진 것, 내가 어찌 오지 않은 미래를 파악해보겠다고
미리 결정해버리고 우려하는 삶을 살소냐. 그때가 되면 또 다 무슨 수가
생기겠지.
호들갑, 노심초사, 걱정, 수용, 명상, 평화,
회의, 수용, 명상, 평화... 11월 한 달은 이런 싸이클을 몇 번 반복하며
나 자신을 잘 관찰할 수 있었던 축복받은 한 달이었다. 지원서류 제출
후, 지도교수님께 이렇게 메일을 써보냈다: '취직 결정이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취직이 되는 것, 안되는 것과는 상관없이, 이번에 대학에 지원한 그
경험 자체를 소중히 여깁니다. 지원하느라 선생님과 이렇게 다시 연락을
주고받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취직 결정이 나는 날 나는 축배를 들
것이다; 취직이 됐으면 새로운 길을 신께서 열어주셨으므로, 또
취직이 안됐으면 현재의 길을 더 걸어보아도 좋다는 신의 격려를 받은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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