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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옷차림에 큰
애정이 없어 대충 입고 살고, 옷 사는 것 자체를 매우 싫어한다. 그냥
손에 집히는 대로 빨래감 많이 안 만들 요량으로 편한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생활한다. 거의 매일 자전거를 타지만, 보통 산악 자전거 타는
이들처럼 울긋불긋하고 요란한 복장 한 벌 없다. 산에 자전거로
오를 때도 그저 머리통 보호할 목적으로 헬멧 하나 쓸 뿐이다. 이런
나의 취향에 대해서 가까운 이들은 이러쿵 저러쿵 평이 많았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걸치고 살아왔고, 패션 같은 것은 비본질적인 부분으로
간주하는 나의 고리타분한 편견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사십대를 넘기면서 조금 사정이 달라진 것을 느끼게 되었다. 용모도
어려보이는 탓인지 몰라도, 대충 입고 다니면 사회의 이곳저곳에서 무시당하는
일이 자꾸 발생하는 것이었다. 나의 직업적 계통에서는 '선생님' 호칭으로
불리우고 대접받고 사는데, 혼자 청바지 입고 운동화 끌고 나다닐 때면
'이봐 학생'으로 불리우기도 하고 반말짓걸이 등도 예사로 듣게 된다.
특히 우리 사회라는 것이 상대방의 연령에 기초해서 그에 대한 존대
내지는 깔아뭉갬이 정교하게 결정되는 곳이기에, 허름한 옷차림에
젊어 보이는 내가 어디에 가서 존대 받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겠다. 나 역시 정장으로 빼입고 목소리 깔고 행동하면 내가 '존대'
받는 것 정도는 안다. 그래서 아내는 나더러 이젠 나이에 맞게
점잖게 좀 차리고 다니라고 그런다. 허나 나는 이게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막 대함'을 몸으로 겪고 삶으로써, 이
사회의 응달에서 매일 그런 식으로 대접받고 살 수밖에 없는
이웃들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공감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며 - 오만한
발상이기는 하나 -, 나아가서는
그런 '막 대함'에도 초연해지는 수련을 쌓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심산에서였다.
결국 껍데기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을. 그래서 아내에게 잘난 척
하며, 나는 계속 이 꼴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언제나 신의
특별한 은총을 받고 살고 있다고 믿는 나에게는 내가 마음 먹은 일을
신께서 금세 주선해주시는 일이 빈번하다(고 믿으며 산다). '막 대함'에
나를 열어놓음으로써 껍데기에 대한 연연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수행을 하겠다고 위와 같이 공언하고
얼마 안 지난 어느 날 늦은 저녁 무렵, 나는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귀가하고 있었다. 인적 드문 저 앞의 횡단보도에 보행자 신호가 꺼질락
말락 하고 있는데, 한 남자가 황급히 6차선 도로를 뛰어 건너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나의 스피드와 뒤에서 다가오고 있던 버스의
추적 등을 재빠르게 계산한 - 살벌한 서울 차도에서 자전거 타기 짬밥 십수년인
- 나는, 그가 길을 다 건너는 순간 바로 그의 뒤로 스치듯이 지나갈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는 자전거를 세우지 않고 계속 횡단보도 쪽으로
전진했다. 그런데 그의 앞 약 이, 삼미터 앞 정도까지 왔을까, 갑자기 그가 나에게로 몸을 돌려 뛰어오는 게 아닌가.
돌발사태에 당황한 나는 그를 칠까봐 순식간에 자전거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어야 했는데, 그는 어둠 속에서 나에게 이렇게 외쳤다: "이눔아,
사람 칠려고 그러냐!" 자신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데도 멈추지
않고 다가오던 나에게 격분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예상 못한
상대방의 행동에 놀라 자전거에서 넘어질 뻔 햇던 터였고, 느닷없는
막말 호통에 화가 치민 나머지, 그에게 이렇게 한마디 내뱉고야
말았다:
"저게 미쳤나!" 그의 분노에 찬 얼굴에 대고 똑같은 악귀의
얼굴로 이렇게 내뱉고 내
갈길을 계속 갔는데, 어둠 속에서 지나치면서 보니 그는 육십도 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생면부지 타인에게서 이놈 소리를 듣고 보니 화가
치밀었지만, 환갑은 넘었을 그 노인은 까맣게 어린 - 아마도
그가 보기에는 이, 삼십대의 새파랗게 젊은 - 놈으로부터 미쳤냐는
반말을 들은 것이다. 신을 만나고 '착해진' 나도 이런 경우에는 욕이
나온다. '씨-팔' 하고. 바로 나 자신에게 하는 욕이다.
그러나
이 정도 부끄러운 행동으로 낙담할 내가 아니다. 반성하고 곧바로 다시금
즐겁고 활기찬 모드로 되돌아온다. 그런데, 며칠 후에 또 이와 유사한
경우가 발생하였다.
이번에도 나는 역시 허름한 옷차림에 등에는
배낭을 짊어지고 자전거를 타고 오후의 좁은 길을 지나고 있었다. 2차선인데다
한쪽에는 차들이 주욱 늘어서 있어서 더욱 비좁은 저 앞 길에서
중국집 배달원 오토바이가 시동을 켜는 소리가 들렸다. 오른 켠에 있던
그 오토바이를 피해 왼쪽으로 자전거 핸들을 돌렸는데, 그 배달 오토바이는
내가 미처 지나치기도 전에 내 쪽으로 왈칵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오토바이에
칠 것 같아 핸들을 더욱 왼쪽으로 꺾어 겨우 그 사정거리를 벗어났지만,
뻔히 다가오는 나를 보고도 위협적으로 오토바이를 들이민 그 놈이 얄미워서
자전거를 세우고 노려봤다. 그러니 새파란 그 녀석도 나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저걸 그냥' 하는 성질이 안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 내가 이게 무슨 꼴인가. 녀석은 계속 째려보라고 놓아둔
채, 나는 말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순간
내가 미쳣냐고 퍼부어댔던 그 노인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난 그
노인에게 반말이라도 퍼부었지만, 그 배달원은 말없이 째려보기만 한
것이었는데도 나는 울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그 노인네는 얼마나 열이
받았었을까?
인과응보 씨스템에 의한 수행 프로그램을 신께서
나를 위하여 충실하게 돌리고 계시는가 보다. 현상계의 시각으로
보면, 현대 도시생활 속의 사회적 갈등 내지는 남성의 공격적 성향에
대한 제어 능력 부족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위의 두 작은 사건을 '영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나의 표면적 자아에 대한 가련한 애착의 정도를
깨우쳐주기 위한 인과응보 교육 프로그램이라고 볼 수 있겠다.
두 번의 경우
다, 나의 겉모습과 관련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생각해서,
'아, 나도 이제 사회에서 나이에 걸맞는 대접을 받고 살려면 좀 점잖게
차리고 다니고, 밤낮 없이 자전거나 끌고 다니는 것도 그만둬야지'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무시당하고' '막 대함' 당했던
두 경우에 대하여, 그것들이 특별히 불명예스러운 사건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리고, 내가 양복 입고 승용차 몰고 다니며 발에
흙 안묻히는 생활에서는 잘 겪을 수 없는 경우를 자전거 타고 저자 거리
헤치며 다니면서 겪게 되는데, 이것이 하나의 가르침의
장으로써 나에게 제공되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내게 짧은 간격을 두고 일어난 두 개의 사소한 사건은 내가 나의 겉
껍데기를 버리기로 마음 먹은 그 정도가 얼마나 진실했는가에 대한 일종의
검증 단계였다고 본다. 비록 나는 내가 느닷없이 겪게 된 '막 대함'에
순간적인 분노로써 대응했지만, 그 분노는 지속되지 않았다. 대신 나는
과거의 나에 비한다면 엄청나게 짧은 시간 만에 나를 '막 대한' 상대방에
대한 분노를 털어 버리고 나에게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내가 나의 껍질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마음 먹은
이후(새삼스럽게 이런 마음을 먹어야 할 현실적인 중대 사안 한 가지가
나에게 최근에 발생했다), 위의 자전거 사건들 말고도 이런저런 다른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다. 그런 일들은 대체로 즉각적인 불쾌감을
수반하지만, 곧 깊이 생각하는 모드로 나를 끌어넣어 준다.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나는 신께서 내게 제공해주시는 친절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받아들인다. 나의 목표는, 다음 번의 렛슨에서는
순간적인 불쾌감이나 분노로부터 성찰에 이르는 그 시간적 간격을 더욱
좁혀보는 데 있다.
윗글에서
'막 대함'을 계속 인용부호 안에 넣은 이유는, 그것이 철저히 나만의
주관적인 인식이었음을 표현한 것이다. 진실로 나를 막 대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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