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구

원래 뭘 할랬더라? (2003/2/1)

간밤에 모아둔 쓰레기 더미를 버리러 부엌 뒤켠 다용도실 문을 연다. 전등이 안 켜진다. 전구가 나갔나 보다. 천장의 전구를 갈아끼우기 위해 식탁 의자를 하나 가져온다. 의자에 내가 좋아하는 하얀 터틀넥 셔츠가 걸려있는데, 딱 목 부분에 김치국물이 묻어있다. 짜증 난다. 어쨌든 그 셔츠를 딴데 치운 후, 다용도실에 의자를 놓고 올라가서 반투명 유리 커버를 벗겨내니, 커버 속에 지난 세월 동안 쌓인 먼지와 벌레 시체가 가득. 맨손으로 그것들을 치우기가 싫어 휴지를 찾으니 주위에 휴지도 없다. 화장실에 가서 휴지를 뜯어와 벌레들을 훔쳐내서 쓰레기통에 버리려 하니, 쓰레기 수거봉투가 안 끼워져 있다. 부엌 서랍에서 봉투 하나 꺼내 쓰레기통에 끼우고 거기다 벌레 사체 처리한 휴지를 버린다. 전등에 전구가 2개 붙어있는데, 하나를 돌려빼고 두 번째 놈을 빼려다 전구의 유리 부위와 금속 캡 부위가 거의 절단이 되어버린다. 금속 캡을 돌려 빼내야 하는데 손으로는 못하겠다. 감전 위험도 있고. 의자 위에 서서 천장에 매달려 달랑거리는 전구를 한 손으로 잡은 채 아내를 불러 펜치를 가져다 달라하니, 아내가 공구서랍에서 그걸 못찾겠단다. 계속 한 손으로는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전구를 잡은 채로 - 약간 짜증이 나며 - 그러면 아무 거나 비슷한 다른 공구를 집어다 달랜다. 아내가 가져다준 공구로 전구의 유리 부분을 완전히 절단시키고 나서 애자 속에 박혀있는 절단된 금속 부분을 돌려 빼내려하다 보니, 지금 전등의 전기 스위치가 켜져있는지 꺼져있는지가 불확실하다. 언젠가 전선 작업하다 감전 쇼크로 나가 떨어졌던 기억이 퍼뜩 난다. 옆에 있던 아내에게 스위치가 켜진 건지 아닌지를 확인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박혀있는 금속부분을 겨우 돌려서 빼낸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부러진 전구 돌려빼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공간 구조상 오른손을 쓸 수 있는 자세가 나오지 않는 곳에서 해야만 할 때는 특히나 더. 빼낸 부분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서 보니 집에 여분의 새 전구가 없다. 할 수 없이 단 하나 있는 값비싼 삼파장 형광램프를 임시로 다용도실 전등에 끼워넣는다. 그리고 유리 커버를 도로 씌우고. 드디어 불이 켜진다. 휴우 --

그런데, 불을 키고 나니, 내가 여기 뭐하러 왔었는지가 도통 생각이 않난다.

내가 원래 뭘 할랬더라? .....

애들이 끝없이 '왜?'라는 질문을 할 때 암만 생각해봐도 대답해줄 게 없으면 언제부턴가 "원래 그래"라고 말해주기 시작했었다. "왜 꼬꼬닭은 꼬꼬댁 하고 울어?" "..... 원래 그래...." 그러다 보니 "원래 그래" 대답의 빈도수가 차츰 증가했다. 아직 세돌도 안된 '여우' 둘째, 애비가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을 못찾아 헤맬랑 치면 애비를 살펴보고 눈치 빠르게 알아서 스스로 답을 제시한다: "월래 그래!"

내가 월래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더라? 아, 딸 얘기가 아니라 전구 갈아낀 얘기였지.....

난방도 안들어오는 차가운 다용도실에 서서 한참을 생각해보니, 원래 거기 모아둔 쓰레기 봉투들을 처치하러 왔었다는 걸 기억해낼 수 있었다. 죽으면 늙어야지... 하고 성능 불량이 된 나의 뇌를 탓하다가 또 의문이 떠올랐다. 그럼 그건 원래 왜 하려던 거였지? 쓰레기는 원래 왜 치우려 했었지?

난 원래 뭘 하려고 여기 왔었지?

내가 원래 뭐하러 태어났더라?

그냥 나이 먹고 애 낳고 늙어서 죽으려고? 성장하고 교육 받고 취직해서 사회에서 기능하려고? 돈 벌려고? 즐기려고? 그걸 기억해낼 수 있나? 그런 목적 같은 건 없다고? 아니야, 분명히 있었는데.... 나한테는 있었다구, 전구 갈아끼우는 '일상' - '현실,' 또는 '현상' - 때문에 잠깐 깜빡해서 그렇지. 그래, 이제 기억이 났어! 원래 뭘 하러 여기 왔었는지 기억이 났어!

엊그제는 설거지로 사랑을 찾았듯이, 오늘은 전구 갈아 끼우기로 사랑을 찾았다.

맞다, 난 사랑하러 여기 왔었다.

'수행일상 2003'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