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욕

물욕(物慾) (2003/1/11)

계속 '자유'를 화두로 일상수행 진행중. 나를 속박하고 가두고, 나의 자유를 오그라들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있어서는 아직 별 진도도 못나가고 있고, 그런 것들이 무엇인가를 그저 하나, 둘씩 식별할 수 있게 된 정도라고나 할까... 나를 구속하는 것들의 리스트 범위가 만만치 않다. 그중의 하나가 물욕(物慾)이다. 워낙에 물욕이 적은 편인데 요즘들어 그것이 부쩍 증폭되어 버렸다. 영적인 차원에서 나 자신이 물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수행 프로그램을 작동시켰다고 믿는다.

1999년에 산 나의 첫 핸드폰을 마침내 교체했다. 저절로 꺼지는 증상만 없어도 계속 썼을 것이다. 그런데 이십만원도 넘게 주고 산 새 핸드폰의 날렵한 모양새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괜히 기분이 좋다. 고놈 자-알 빠졌다 하는 생각과 함께. 물건이 나를 기분 좋게 한다. 전에는 내심 경멸했던 타인의 행위 - 비싼 핸드폰 자꾸 사는 - 를 이젠 이해하겠다. 1998년에 미국에서 산 노트북 컴퓨터는 아직도 내 기분을 좋게 해준다. 14인치 모니터, 새까만 몸체. 스마트함. 첨단. 정예. 정보와 지식 컨트롤. 노트북이 나의 (허영에 찬) 자아의 발현이다. 자아와 물건이 일치된다. 그래도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바라보며 기분 좋아하는 건 조금 봐줄 수 있다. 봐줄 수 없는 건 내 수중에 없는 물건들을 보고 강한 소유욕을 느끼는 점이다.

몇 년전부터 미니밴이 계속 탐이 난다. 널찍한 승합차에 온가족 싣고 전국 유람 떠나보는 게 일종의 꿈이 되어 버렸다. 개도국에서 온 외국 손님들이 "very big"이라고 했던 지금의 내차가 갈수록 작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얼마 전 홈쇼핑 채널에서 자동차 내비게이션 시스템 광고를 보고는 거기에도 홀딱 빠졌다. 미니밴에 저런 거 떡 붙여놓고 전국 유람을 떠나면 진짜 재밋겠다 하는 생각이 들고. 그뿐인가. 11년 된 텔레비전도 바꾸고 싶고, 15년 된 오디오도 바꾸고 싶고, 그래서 홈씨어터 시스템 들여놓고 벽걸이 텔레비전도 걸어놓고 싶고. 컴퓨터 모니터 앞에 얼굴 들이대고 앉아서 키보드 두드리는 네살박이 둘째 때문에 LCD 모니터도 사야겠고. 맛이 간 캠코더도 교체해야겠고....

한 마디로 한이 없다.

작년 내내 벼르다가 연말에 번 돈으로 산 것이 하나 있다. 욕조. 여직껏 욕조가 없어 어린 딸내미들을 대야에 물받아서 목욕시켰는데, 아내가 그동안 노래를 하던 욕조를 수십만원 주고 들여놓은 것이다. 그 이후론 온가족이 거의 매일 욕조에서 목욕을 한다. 거의 욕조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새것이라 번쩍이는 하얀 욕조를 나는 매번 쓰고나서 정성껏 수세미로 닦는다. 씻기 싫어하던 애들이 자발적으로 목욕을 원한다 ..... 참 잘샀다는 생각이 든다. 욕실에 욕조 사다 놓는 것을 사치라고 할 수도 없고, 꼭 필요해서 오랫동안 바랬던 것을 땀흘려 번 돈으로 산 것이고. 한 마디로 건전한 소비행위 사례라고 말할 수 있을 게다. 그런데, 욕조가 없을 때보다 더 행복해졌을까? 글쎄, 아무래도 그건 모르겠다. 소유가 나의 행복을 제고했는지. 현명하고 건전한 소비행위가 나의 행복을 향상시켰는지 어쩐지. 모르겠다. 욕조가 없을 때도 우리 가족은 행복했는데...

나의 고리타분한 60-70년대식 결론: '물건을 소유하는 것은 오로지 '필요'에 의해서만 정당화할 수 있고, 물적 소유와 행복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내 눈앞에서 은은한 크롬색으로 빛나는 최신형 핸드폰을 바라보는 쾌감은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매우 수동적인 도취다 (아마도 만약 몇 억원 하는 외제 스포츠카를 소유해서 바라보고 있다면 그 도취의 정도가 훨씬 심하겠지). 현상계에서 내 눈꺼풀 위에 씌우는 환각제와도 같은 것. 그 환각제 자체가 좋고 나쁘고를 판정하는 것을 떠나서, 환각제는 나의 집중을 방해한다. 머리도 안쓰고, 사색도 명상도 안하고, 내 안에 꼭꼭 숨어있는 사랑의 마음도 끄집어내보지 않고... 그리고 그저 멍하니 환각에 빠져 물건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 침을 질질 흘리며, 썩은 동태눈깔을 하고. 그러는 사이 언젠가 깨달았던 나의 삶의 본뜻은 썩는 도끼자루와 함께 서서히 소실되어 가고...

나는 내게 진짜로 필요할 것들이 살다보면 다 주어질 것이라고 믿고 사는 단순무식한 신자(信者)다. 그러나 그 믿음을 잠시나마 망각하면 아직 내게 주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욕구가 일어난다.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내 성정을 쏟아붓기 시작하면 나는 헛된 내 인생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 내가 내 인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본질인 신성(神性)을 드러내기 위한 삶을 돕기 위하여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활동 그 자체를 위한 삶으로 전락해 버리게 된다. 결국 삶은 자유로부터 점점 멀어져간다. 나의 물욕을 나는 계속 주시하고 있다. 관찰하고 있다. 그것이 나를 속박하는지 해방하는지 끈기를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 위에 올린 쿄토의 금각사 사진이 황금숭배를 암시하기 위한 장치는 아닙니다. 일본불교에 대한 어떤 판단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금각사라는 소설을 쓴 미시마 유키오에 깊이 매료되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의 전체주의 미학에는 동조하지 않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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