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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욕(物慾), 가족, 그리고 자유 (2003/1/18)

1.
물건을 또 하나 샀다. 칠십만원대의 고가품. TFT LCD 모니터. 18.1 인치. 두달 동안 궁리하고 연구한 끝에 아주 좋은 품질의 제품을 최저가에 샀다. 또다시 현명하고도 건전한 소비자가 되었다.

난 최신 기계류에 약하다. 그동안 이런 나의 약점을 컴퓨터라는 괴물이 더더욱 부풀려왔다. 세상이 아직 386을 주로 쓰던 10년 쯤 전에 '멀티미디어' 486 컴퓨터를 장만하고 CD 롬을 사용했고, 나중엔 학위 논문 쓴다고 14인치 모니터 달린 노트북 컴퓨터로 바꾸고, USB란 게 처음 나돌 때 그거 달린 주변장치 줄줄이 구입하고, 비디오다 캠코더다 죄다 컴퓨터 연결해서 장난치고, 전기 키보드로 온갖 노래 편곡하고, 디지털 카메라 사서 가족사진을 파일로 관리하고, 최신 MP3 플레이어 언제나 목에 매달고 다니며 보이스 리코딩으로 볼펜과 메모지 대체하고, 이제는 최신 디지털 형식의 DVI 모니터를 떡하니 책상 위에 올려놨다.

컴퓨터는 내 삶을 엄청나게 많이 도와준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컴퓨터를 사용해야 된다. 그래서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되거나 심각한 이상이 생겼을 때엔 등줄기에 식은땀이 좍 흐른다. 바이러스 퇴치하느라 며칠 컴퓨터 못쓰고 있을 때 정말 내가 얼마나 이 작은 기계에 의존하고 살아왔는지 절감했다. 나에 대한 컴퓨터의 지배는 실로 강력했던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이후로는 컴퓨터라는 물건과 기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줄곳 생각해왔다. 결론은: '쓰긴 써야겠다. 허나 쓰면서도 그것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하여 늘 깨어있어야 한다.'

아이들의 컴퓨터 사용을 위해서 샀지만 결국은 주로 내가 쓰게 된 이 모니터. 한 마디로 끝내준다. 당연히, 보고 있노라면 도취된다. 그 도취가 마약과 같은 것인가 곰곰히 따져본다. 그다지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일종의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과 같은 마음가짐도 있을 수 있으니까. 지나치게 도취되어 있지만 않다면, 아이들 시력을 보호해주고 전자파를 줄여준다는 점 등등 장점도 많으니까 무조건 소유욕의 발현이라고 비난할 건 없다. 그런데, 좀더 곰곰이 따져보니, 나의 소유욕, 물욕의 밑바닥에는 다른 것에 대한 욕심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건 바로 가족에 대한 욕심이다.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쥐어 주고 싶다는 애비의 욕심.

'필요'에 의해서 컴퓨터나 책 등에 쓰는 돈 말고 나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은 거의 없다. 남들처럼 택시도 안타고 다니고(엊그제 모임도 자정이 넘어 끝났지만, 친구들 택시 태워 보낸 뒤 나는 심야 좌석버스 타고 귀가했다), 비싼 술집 절대로 안 가고, 나름대로 검소하게 산다. 오죽하면 학생들이 '교수님의 검소한 옷차림이 인상적이었다'는 말을 했을까. 그러나 가족을 위해 쓰는 돈은 별로 아낄 줄 모른다. 아마 돈이 많아서 사치할 형편이 되었다면 자식을 위해서 사치스러운 물건도 사줬을지 모른다. 단지 지금 돈이 없어서 못할 뿐이지. 지금 내 소유욕 리스트에 올라 있는 물건들은 전부 처자식을 위해 소유하고픈 것들이다. 가족 태우고 여행가고 싶어서 미니밴을 갖고 싶고, 가족과 집에서 재미있는 영화 보고 싶어서 홈씨어터가 갖고 싶고, 한창 재롱피우는 둘째 놈 모습 담아주고 싶어서 캠코더가 갖고 싶고... 뭐, 다 이런 식이다.

2.
물론 문제의 본질은, 무슨 연유로 소유욕이 발생했느냐에 있다기 보다는, 그 소유욕의 성격과는 상관없이 소유욕이 나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소유욕의 성격 역시 심사숙고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위해 품는 소유욕을 버리는 것에 비할 때, 자식을 위해 품는 소유욕을 버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 사회심리, 문화심리적으로 - 더 강력한 의식의 저항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자식이라는 것은 참 강력하다.

내가 나이 들고 나서 다시금 초월자에 대해 의식적으로 마음을 돌려본 것은 비정상적으로 어렵게 첫애가 태어났을 때였다. 그 이래로 아이들은 내가 신과의 관계를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표면적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매우 강력하면서도 일관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리고 그 영향력의 기저에는 나의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자식이 너무도 소중하여 나의 두려움이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식이 어디라도 잘못 될까봐 애지중지, 건드리면 터질까, 불면 날아갈까 노심초사... 이런 어리석음 - 이제는 어리석었음을 안다 - 의 밑바탕은 두려움이었다. 그 소중한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 그 마음이 내가 약 4년 전 신께 다가가게 만든 불씨였음을 이제는 안다.

신과의 관계로 삶을 재정립한 이후로는 예전에 비해서 그 두려움을 훨씬 더 잘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현명한 한 미국친구가 내게 조언해준 바를 잘 따르고 있다. "Enjoy your family"라는 조언을. 다행히 두려움의 굴레에서는 조금 풀려났다고 할 수 있지만, 이제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 자식 위하는 욕심 말이다. 물론 부모의 자식 사랑에는 숭고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세상 만사가 그러하듯 부모의 사랑에도 숭고하지 못한 측면이 역시 있다. 그것은 바로, 오직 제 자식만 위하겠다는 마음이다. 교육학자로서 보건대, 현재 우리 나라 교육 현실의 어두운 부분은 부모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제 자식만 위하겠다는 욕구의 결합에서 발생한 측면이 크다. 제 자식만 위하는 마음은 추악하다. 그 추악함을 나는 다른 대부분의 부모와 공유하고 있다. 내 자식 귀한 줄 알면 남의 자식도 똑같이 귀한 줄 알아야 하거늘...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대형 할인점 계산대 앞에는 거대한 장난감 꾸러미를 수레에 담은 부모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나 또한 그 대열에 끼어 있었고. 부모에게는 그 거대한 장난감을 풀어보고 기뻐할 제 자식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그런 부모의 마음에는 분명히 숭고한 면도 있다. 그런데, 그 대열 속에는 초라한 행색의 한 사십대 남자가 끼어 있었다. 그의 옷차림으로 보아 막노동하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의 손에는 이, 삼천원 하는 초라한 싸구려 장난감 한 개가 들려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수레에 싣고 있는 커다란 박스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그 초라한 장난감을 본 순간, 내 자식을 위한 나의 사랑이 자랑스럽지만은 않았다. 수레에 실린 장난감 박스의 크기가 부끄러웠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물건을 통해 표현될 때, 그런 '사랑'의 추악한 면이 쉽게 드러난다. 내가 자식을 위해서 소유하고자 욕구를 느끼는 물건들을 다시 한 번 따져본다. 그 안에는 숭고한 부모 사랑의 측면도 반영되어 있다. 동시에, 추악한 면이 자라날 소지도 많이 보인다. 딸애의 시력보호를 위해 사고자 했던 LCD 모니터의 크기가 15인치에서 18인치로 자라나고 불우이웃돕기 성금 액수는 줄어들듯이.

3.
제 자식 위하는 마음에서 품게 되는 물건에 대한 소유욕도 어짜피 똑같은 물욕이다. 자식을 위해서 소유하게 되는 물건들도 오직 '필요'에 의해서만 그 소유가 정당화된다. 필요한 부분을 초과하는 것들을 정당화할 방법을 나는 모른다.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굴레고 속박이다.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들이다. 나는 자식 때문에 품게 되는 물욕까지도 관찰(monitoring) 대상에 넣었다. 더 나아가, 내 가족을 위하는 마음까지도 관찰 대상에 포함시켰다. 물욕과 가족애가 뒤엉켜서 조금 복잡해졌다. 그래도 명확해지는 부분이 있다. 내가 어느 정도 물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면, 그 다음에 다뤄야할 과제는 가족애라는 것.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전에는 물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기 어렵다는 것.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 현실적으로 윤리적인 지탄을 받아 마땅할 이런 명제의 영적인 의미를 깊게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알고 있다. 나 자신이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나의 처자식이 '가장(家長)'이라는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길이라는 것을.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들이 이 인생을 갖게 된 본뜻에 합당한 길임을. 오직 서로를 자유롭게 해주어야만 서로가 품고 태어난 귀중한 인생의 의미를 스스로 풀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나의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과 내가 물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이 두가지가 실은 같이 맞물린 일들임을 안다. 전자 없이는 후자를 이루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 상상할 수 있는가?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가족을 등한시 한다거나,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의 책무를 소홀히 한다거나, 혼자 먼데로 떠나 버린다거나 뭐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 쯤은 안다. 나는 지금 하고 있듯이 내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그들을 나로부터 떨궈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없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말이다.

과연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가족에 대한 소유의식까지 떨쳐 버리고, 식솔 딸린 남자가 진정한 무소유를 실행에 옮길 수가 있을까? 나는 성철스님이 자신을 찾아온 딸을 냉대한 것이 영적인 차원의 깊은 의미가 담긴 행위라고 생각한다. 나라면 도저히 그런 건 못할 것 같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여도 그것이 '길'임을 알고 있는 이상 그것을 추구할 밖에. 신을 만난 이후로는 모든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의 가능성을 믿게 된 만큼. 또, '내'가 못하면 신께서 도와주신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최일도 목사님의 책 제목을 되뇌어 본다.
'참으로 소중하기에... 조금씩 놓아주기'

'수행일상 2003'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