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거울 (2003/9/13)
 

이 싸이트가 '거울'이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사람 마음 속의 모든 구석을 비추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왜 꼭 '선한 그림자'만을 비추어야 하나? [출전 - 영화 '쿤둔'에 나온 달라이 라마의 다음과 같은 말: "나는 그림자일 뿐이오. 물위에 비친 달처럼 나를 통해서 그대들의 선한 그림자를 보길 원할뿐."] 선하지 않거나 어두운 그림자도 많은데... 증오, 분노, 회한, 허무감, 욕정, 폭력성, 모든 분리의식 등등. '뉴 에이지'란 것이 지나치게 밝은 면만을 부각시키고 어둠을 무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존경하는 길벗의 의견에 나 또한 깊이 공감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어둠도, 악도 맛보고 깨닫고 난 후에 폐기하든 말든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나의 싸이트는 '그대들의 선한 그림자' 뿐 아니라 '사악한 그림자'도 비추어주는 기능을 해야하지 않을까? 고결하고 성스러운 싸이트들에만 링크해놓을 것이 아니라, 싸이버 세계에서 찾아낼 수 있는 가장 사악하고,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음란한 싸이트들도 잔뜩 소개해놓아야 할 것 아닌가?

어릴 적부터 내게 있어선, 인간 내면의 악마성이 부인할 수 없는 탐구 대상이었다. 분명히 기억컨대 나는 유년기부터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고, 물론 그 당시에는 이런 어휘도 개념도 갖고 있지 않았었지만, 단순한 권선징악을 내세운 만화나 위인전 등을 경멸하여, 인간 내면의 복잡한 구도와 빛과 어둠의 모순된 자리바꿈을 보여주는 작품들에 빠져들곤 했었다. 예를 들어, 내가 홀딱 반해 있었고 알고보면 매우 복잡한 만화인 일본의 '마징가젯트'를 모방한 우리 나라의 '태권브이'의 주제에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가치관의 환원주의적(reductionist) 단순화와 선악이분법은 정말로 초장부터 나의 김을 빼버렸고, 그 이후로도 일본 만화를 한국의 그것에 비하여 질적인 비교우위에 놓고 대하는 나의 편견을 확립해주고 말았다(그러나 '공포의 외인구단' 시절이 끝난 후부터 걸출한 신예 만화 작가들 - 박흥용, 이희재 같은 - 과 존경할 만한 명작 만화들이 이 땅에도 점점 늘어났던 것을 기억한다). 마징가젯트를 만든 나가이 고라는 작가의 여타 다른 작품들을 탐독하던 사춘기 초반 시절, 우리 내면의 야수성과 악마성이란 소재는 나로 하여금 다시는 인간을 단순히 바라보지 말 것을 강력하게 명령했었다. 성인이 되어 역사 공부를 하면서도 전쟁, 정치적 암투, 범죄 등을 통해서 드러나는 인간의 그러한 어두운 면에 줄곳 주의를 기울였었다. 빛과 사랑으로서 나를 발견한 이후에도 나의 어둠에 대한 인식의 축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나의 내면에 당연하게 잔존해있는 어둠은 새로이 찾은 빛과의 지나치게도 선명한 대조로 인하여 나를 새삼 치열한 내적 혈투의 장으로 내모는 일이 허다했었다.

나의 현재의 평화는 어둠과 악의 제거의 산물이 결코 아니고, 그것들을 인정하고 그것들과 함께 살기로 결심한 것의 결과이다. 그러니, 내 싸이트의 방문객들도 자신들의 어두운 면까지 찾아내고 그것의 도전에 용감하게 맞설 수 있도록 이 싸이트가 도와주어야 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건 실로 바보같은 생각이다. 이 싸이트는 방문객들의, 그리고 나 자신의 '선한 그림자'만을 비추어주는 기능에 집중할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세상이 밸런스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이미 어둠으로 충만해 있고, 싸이버 세계 역시 포르노와 폭력과 증오로 도배가 되어 있다. 메일 박스에는 거의 매일 포르노 싸이트 스팸 메일이 들어와 앉아 있고, 언제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텔레비전, 영화 등등은 거의 다 폭력의 찬양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으며, 인터넷 게시판에는 언제나 욕설과 비방과 증오가 난무하고 있다. 굳이 내가 나서서 어둠의 챌린지를 추가로 선사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세상의 밸런스를 맞추려면, 지금 절대적 열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빛,' 또는 '선한 그림자' 쪽 편을 들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월쉬 선생께서 받아쓰기 해둔 신께서 주신 가르침 하나가 꽤 위안이 된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여러 번 되풀이 된 윤회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 내면에 관해서 이미 많은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굳이 인간의 어두운 면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가 어둠을 꼭 이번 생에서 몸소 경험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우리가 그 가르침을 기억해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간접 체험을 하는 것 정도로도 충분하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래, 기억을 북돋워주는 매체만 있으면 되겠다! 이왕이면 고급스럽고, 정교하며, 품위있는 매체들로,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고전들 말이야. 최근에 본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같은 영화도 괜챦겠지, 잔혹한 복수를 벌이는 주인공들의 사악함에 동조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해주고, 심지어는 그 어쩔래야 어쩔 수 없는 비극적인 복수마저도 절대적인 존재의 요청인 용서를 가르쳐 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해주지 않는가.

그래서... 나의 전부를 알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와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둠의 챌린지를 받아들일 때에 터득한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어둠은 자신의 존재함을 인정받을 때 힘을 얻게 된다; 그러나 어둠을 고요하게 바라보고만 있노라면 어둠의 힘은 빠져나가버리고, 어둠은 햇살 받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버리고 만다. 따라서 어둠은 똑바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단지 그러면서 나의 선한 그림자를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둘째, 어둠을 끄집어내서 멱살을 잡고 싸움을 걸어 박살을 내고 제거해 버리려 하는 것은 오히려 어둠에게 더 힘을 불어넣어줄 뿐이고, 따라서 어둠을 가만히 내 내면에 있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본다. 나는 깨달은 이가 자신의 내면의 어두운 면을 없애버리는 데 성공한 이라고 믿지 않는다; 깨달은 이는 자신 내면의 어둠을 가만히 놓아 두고, 때로 그것이 뛰쳐나오려 해도 그것에 의해 영향받지 않고 그것이 제풀에 지쳐 도로 들어가 버릴 때까지 가만히 바라볼 수 있는 이라고 믿는다.

셋째, 어둠과 밝음의 모순된 공존이 신께서 선사한 인간의 숙명임을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수행의 길, 험난한 가시밭 길, 그러나 즐겁고 신나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