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자 (2003/4/5)
 

1.
지난 주에 '책의 지혜' 섹션에 올린 다치바나 다카시씨의 신비주의에 대한 설명대로 따져보면, 저는 "신과 합일되는" 경지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습니다만, "최초의 단계"라는 순간적인 통찰과 "고차원적인 체험"이라는 황홀 상태는 체험해보았습니다. 제가 들은 저의 길벗 한 분의 체험을 떠올려보면, 그분은 "신과 합일되는" 경지에 다다렀던 것 같습니다. 그분께서 그것이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자각 상태였다고 하시더군요. 물론, 체험해보지 못한 저로서는 잘 짐작이 가지를 않습니다만.

또 다른 길벗 한 분께서는 남들에게 신(神)체험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 나에게 왔던 신이 사라져버린다는 말씀을 해주시더군요. 뭐 이런 말이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할 사람도 많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일면 그럴 듯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신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한 사건을 타인들과 공유하기 위하여 객관화시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들의 시각, 평가, 판단 등과 어우러져서 탈주관화된 그 체험에 관한 진술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그 체험의 핵심인 신비를 제거당한 김 빠진 진술이 되겠지요. 그 진술에는 이미 신이 사라져버렸다 고나 할까요. 그래서 입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타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허나 행인지 불행인지, 저는 이미 저의 신체험 초기에 저 자신의 체험에 관해 몇몇 분들께 떠벌렸더랬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제가 떠벌렸던 그 과정이 별로 객관화 작업을 동반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즉, '해까닥' 한 상태로, 반쯤 정신 나간 상태로 자신의 주관적인 체험에 관해 떠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께서 도망가지 않으셨던 것인지...

그건 그렇다 치고, 언제부터인가는 웬만해선 그 신체험에 대해 타인에게 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다보니 아무래도 객관화하게 되고, 또 타인들의 판단과 상호작용하게 되더군요. 초기에 정신 나간 상태로 떠들었던 때와는 달리, 타인들이 믿지 못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싫더군요.

세파 속에서 흔들리다가도 곧잘 그때의 초심(初心)으로 돌아가고자,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회상해보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신비주의자입니다.


2.
지금은 세월의 부침 속에 소식이 끊겨버렸지만 예전에는 가깝게 지냈던 한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 선배는 존경스러운 인품의 소유자였고 진실한 크리스챤이었는데, 그에게는 하나의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을 만나는 체험을 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체험이 자신의 신앙의 길의 온갖 미혹들을 일거에 제거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지요. '한 번만 제 앞에 나타나 주시기만 한다면...' 이것이 그의 간구였습니다. 그런데 그와 가깝게 지냈던 그 시기 이후 십년은 족히 흐른 뒤에, 그런 간구 같은 것은 꿈도 꿔본 적이 없는 저에게 신께서 오셨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저는 그것을 하루도 잊지 않고 고이 마음에 품고 삽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 싸이트의 한 방문객께서 신과의 만남에 대해서 문의를 해오셨습니다. 가족을 부양하는 현실 속에서 진실한 신앙의 길을 추구하는 저와 같은 한 남자의 장문의 편지, 그 속에 표현된 그분의 신에 대한 간구는 제 마음에 깊은 공명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곧 그분께 답신을 보내드렸지요. 죄송하지만, 신의 만남을 제대로 설명할 수도, 또 그것에 이르는 방법을 말씀드릴 수도 없노라고....

신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체험하는 형태 자체가 개인마다 틀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의 체험은 저라는 개성에게 일어난 하나의 독특한 임재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형태의 체험 이외에도 무수한 형태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신비주의자 열전을 보아도, 바오로나 아우구스티누스, 프란치스코 등등의 '성인'들, 아니면 심지어 마틴 루터에게 신께서 다가온 형태들은 다양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예들처럼 도저히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다가오는 형태도 있겠으나, 필립 얀시가 끈질기게 붙들고 있는, 일상 속에 담긴 미세하고도 미묘한 신의 터치도 있겠습니다; 물론 후자가 대체로 '영적 갈증'을 풀어주기에는 미흡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듯 하지만요. 그런데, 이런 일상 속에서의 신과의 조우를 저는, 장영희 교수가 썼고 작년에 제가 '아름다운 거울' 섹션에 올렸던 '위대한 순간은 온다'라는 글이 잘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 이야기해주는 체험은 굳이 '신'이라는 개념에 의존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나 자신의 최고가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위대한 순간'이니까요. 저는 그런 위대한 순간이 신께서 임재하시는 순간이라고 믿습니다.


3.
종교 같은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미신처럼 허황된 지껄임으로 여겨질지도 모를 신의 임재. 비록 저는 그것을 설명하거나 그것에 이르는 방법을 소개할 능력은 없으나, 그것에 대한 공부를 아마도 평생 그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 올해 초부터 추진은 하고 있지만 바쁜 일상으로 인해 거의 진도를 못 나가고 있는 개인적인 프로젝트가 실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체험의 일상적 추구에 관한 것입니다. 그 프로젝트의 단초만이라도 이 싸이트에 소개하려면 아마 최소한 반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군요 - 물론 그것도 제 공부에 진전이 있으리라는 전제 하에서만.

과연 인간의 이성적 기능을 사용해서 신의 임재에 대하여 얼마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만은, 저는 신의 선물인 이성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믿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강의하는 교육의 철학 사상 같은 것에 대한 국내 교재들을 보면, 대체로 서양의 교육 사상이 단팥은 빠진 채 밋밋하게 속이 빈 찐빵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제 견해로는 그 단팥이 바로 '참된 나'라고 봅니다. 합리주의와 과학적 사고로 특징 지워지는 서양 교육의 사상적 실체가 '참된 나'라는 말씀이지요. 쏘크라테스 이래로 많은 사상적, 교육적 거성들이 천착한 참된 나라는 것은 실로 '신'과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양의 교육사상의 핵심에 신과 나의 관계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 관찰을 학생들에게 전달할 때에는 조심스러워집니다. 우리는 지금 속화된(俗化; secularized)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속화된 세상이라 하여도 부정될 수 없는 것이 인류가 축적해온 신과 참된 나와의 관계에 대한 지혜입니다. '위대한 순간'을 깨닫는다는 것이 인생에게 주는 의미는 깊고도 중대합니다. 움베르토 에코와 같이 비정상적으로 박학다식한 학자가 1200 페이지가 넘는 '푸코의 진자'라는 책에서 서양 문명사를 마구 헤집고 다니며 끝내 외치고자 한 그 단순명료한 진리도 바로 그 '위대한 순간'입니다. 앞으로 차차 '푸코의 진자'도 이 싸이트에 소개하고, '위대한 순간,' 즉 신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황홀한 순간에 대한 저의 이성적이면서도 초이성적인 공부도 리포트할 계획입니다. 정말 할 일이 많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지극히 행복하고, 신께 깊이 감사합니다. 매일 매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