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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나의 성향이 하나 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써빙(serving),' 또는 시중 들어주는 것을 받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그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떠받쳐 주고 시중을 들어주면 나는 매우 불편함을
느낀다.
대체로 누군가가 움직이기 전에 내가 먼저 움직여서 자잔한 일들을 해치운다.
이런 성향이 우리 가족들 사이에 어느 정도 공유되고 있는데, 그 때문에
형제들 간에선 우리 가문의 조상님께서 노비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제기되기도 한다. 어찌 됐든, 나는 그러한 불편함을 여전히 품고 산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날라다 주는 사람들에게 그렇고, 주유소에서 세차기를
통과한 후 걸레로 물기를 닦아주는 청년에게 그렇고, 오피스텔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그렇고, 아파트 단지에서 재활용품 수거해주는 관리인들에게
그렇고... 나의 이런 성향이 예전부터 접대부 여성이 나오는 술집을
적극적으로 회피하게 만들었고, 캐디가 따라다니며 시중을 드는 골프를
경원시하게 만든 주요 동기였던 것 같다.
요즘들어선 이런 불편함이
심지어 더 커져버렸다. 그런 불편함의 확대에는 내가 누리고 있는 평화와
행복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
2.
한밤중에
텔레비전에서 기구한 운명의 세모녀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다.
고약한 불치병에 걸렸고, 폭력을 휘두르는 술꾼 남편으로부터 도망쳐
나와, 극빈의 상황에서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어느 불행한 엄마의
이야기였다. 나는 그런 실화를 볼 때면 언제나 눈물이 줄줄 흐른다.
흐르는 눈물 속에서 내가 느낀 나의 감정은 슬픔, 분노, 죄책감,
희망 등등이었다. 그런데 전에는 모르던 것을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그것은, 나의 그 감정들이 모두 타당하고, 있을 곳에 있으며 또,
제대로 있다는 앎이다. 슬픔은 슬픔대로, 분노는 분노대로, 죄책감은
죄책감대로, 희망은 희망대로, 다 제 자리에 제대로 있다는 앎.
나의
개인적인 평화와 그들 세모녀의 불행을 대조하는 데에서 오는 자괴감,
불만, 회한 따위 없이, 눈물은 눈물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미안함은
미안함대로 그 자체로 잘 있다는 앎이었다. 잘 있다는 것은, 그런 감정들
전부가 쓸모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에 비하여 늘어진 팔자인 내
신세는 내 신세대로, 나의 수행과 구도는 또 그것들대로, 모두
다 그대로 제 자리에 있는 느낌, 앎.
이러한 느낌이나 앎은 처음
겪어본다. 내가 사회의 음지라는 정황과의 병존 속에서조차도 제대로
있음을 안다는 것은 나로서는 조금 놀라운 일이기까지 하다. 그러한 앎이 나타내는
것은 나의 삶의 조화와 균형이다. 조화와 균형 아래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껴안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아직 그런 경지는 멀었지만). 죄책감이나
자기부정 없이.
3.
장마 사이의 화창한 어느 평일
날, 네 살 먹은 둘째 딸을 자전거 뒤 의자에 태우고 공원에 놀러갔다.
자그마한 샘처럼 만들어 놓은 분수에서 물이 졸졸 흐르고 그 물길이
작은 도랑을 만들다가 커다란 분수로 이어지는 재미난 곳에서 딸내미는
깡총깡총 뛰며 신나게 놀았다. 분수 옆에는 시(市)에서 최근에 가져다
둔 화분에 화려한 여름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각을 진 아치
형태의 석조물 위에까지 울긋불긋한 꽃들을 치렁치렁 매달아 놓았다.
나는 분수 옆에 앉아 내 앞에 펼쳐진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졸졸
흐르는 물, 물안개 같이 퍼지는 분수, 형형색색의 꽃들, 그리고 노래
부르며 도랑에서 첨벙거리고 다니는 사랑스런 딸. 내가 현세에서 이
순간 보다 더한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그대로 천국이다. 나는 딸에게 다가가 두팔로 껴안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내게 선사해주신 축복에 대한 감사를 신께 올리는 입맞춤이었다.
그리고
문득 공원 한 켠으로 시선이 갔다. 그곳에는 초로의 여인네들 너댓명이
타올을 머리에 두른 채 쭈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고 있었다. 순간
가슴 한 구석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천국은 찰나였던가.
나의 삶의 조화와 풍요를 아마도 생전 처음 죄책감 없이 인정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는데, 현상 속에서의 나의 평화와 행복과 저들의
고난과 불행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는데... 나의 그러한 인정, 받아들임은 그것 그대로 타당한 과정이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이제 알게 된 것 또 하나는, 행복에는 분명히 의무가
수반된다는 점이다. 행복을 퍼뜨릴 의무가.
실은, 나는 줄곳 그 의무를 최상으로 수행할
길을 찾고 있던 참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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