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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시. 잠시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여름 오후의 강한 햇살이
서쪽으로 창이 난 내 오피스텔안으로 잔뜩 비집고 들어온다. 실내 온도는
점점 올라가고, 간밤에 잠을 별로 못 잔 탓에 눈꺼풀이 자꾸 밑으로
떨어진다. 에어컨이 있었더라면... 아니지, 시원하고 기분 좋다고 잠만
더 왔을지도 모르지. 7, 8월만 이대로 버티자, 연구소용 특수 복장으로
(사각 팬티 한 장).
나의 연구소, 아직 이름도 못 지은 이 연구소는
혼자 있기에는 꽤 넓다. 그러나 죄책감은 없다. 이 안에서 죽어라고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오직 감사할 따름이다. 친구들이 하나, 둘씩
다녀간다. 나만의 널찍한 작업 공간을 모두들 부러워하며. 가족과 형제의
도움 없이는 이렇게 빨리 차릴 수 없었음을 잘 안다. 방문하는 친구들이
축하 선물을 주고 가고, 아버지는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 싶으시다며
사무기기 살 돈을 주고 가셨다. IT 전문가인 친구는 집에서 세시간 거리인 용산을
두 번이나 왔다갔다 하며 최신형 PC를 손수 조립해주었다. 펜티엄4,
2.4GHz. 나모 웹에디터 쯤은 쌩쌩 돌아간다. 그리 작지 않은 연구소의
모든 벽은 책들로 가득 찼다. 2-3천 권은 될 저 책과 책장들은 죄다
주위 친지들이 날라다 주었다. 처남, 친구, 이웃들. 좀 버릴 수 있는
책도 꽤 되련만, 괜한 내 허영 때문에 주위 사람들 땀 뻘뻘 흘리며 고생하게
만들고...
결국, 내 한 몸 편하게 일하게 해주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도움을 주었는가 하는 데에 문득 생각이 미쳤다.
그 은덕도 까맣게 잊고 그저 정신없이 일만 하고 있었구만.
세상으로부터
언제나 잔뜩 받고 사는 내가 세상에게 되돌려 줄 만한 게 뭐가 있겠나?
아무리 바쁘고, 잠도 못자고 있긴 하지만, 싸이트 업데이트라도 해서
빚을 갚아야지.
그러고 보니 요즘 이사하고, 연구소 차리고,
주문 들어온 번역 일 하느라 눈코 뜰새 없어 내 생일도 어떻게 지나가
버렸는지 모르겠다. '그곳에선
나 혼자만 이상한 사람이었다'에
나오는 호주 사막의 '참사람' 부족원들은 자신이 일년 동안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느낄 때 진실로 생일을 자축한다고 하던데. 나는 내 생일을 축하해주러
와주신 가족, 친지들 접대차 음식점들을 오가며 생일 날을 보내다
보니, 생일이라는 것조차 잊어 버렸었다. 며칠 지나서 생각해보니,
난 작년 보다 조금은 나은 인간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하는데...
이젠 타이밍을 놓쳐 버렸으니 생일을 소급해서 다시 축하할 수도 없겠고...
연구소도
차렸고, 자축도 할 겸 돼지머리에 소줏잔 돌리고 고사를 지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즈음처럼 이렇게 정신없고 바쁘게
지내야 하는 걸 보면 아마도 그런 호들갑은 떨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메시지를 '위'에서 보내고 계신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
조용히 지내고, 자축 행사는 차차 차분히 생각해보기로 하자.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 한다. 내가 재산가나 고소득자도 아니고,
지위나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니건만 나를 부러워들 한다. 그건 내가 항상
속 편히 신나게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믿는다.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
하는 것에 더 이상 미안해 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저 감사만 하기로 했다.
오피스텔
건물 앞의 광장에 분수가 있다. 하루는 저녁 때 두 딸내미들이 놀러
와서 그 분수 옆에서 뛰어 놀았다. 두 여자 애가 깔깔거리며 물 위로
뛰어 다니며 노는 옆에서 '살살 뛰어! 미끄러진다!' 따위의 잔소리나
하고 서있는 내게 한 중년 남자가 말을 건넸다.
"참 좋으시겠습니다."
약간
당황한 나는 뭐라고 대꾸할 줄을 모르겠어서, 그냥 실없는 웃음으로
응대하고 말았는데, 느슨하게 풀어 놓은 넥타이에 하루의
끝 무렵의 피곤이 매달려 있던 그 남자의 쓸쓸해보이는 미소가 기억에
남았다. 무엇이 그렇게 좋아 보였을까? 귀여운 두 딸과 철없이 놀고
있는 것이 그렇게 보였던가 본데.
아무튼 나는 별 생각 없이
보내고 있는 하루 하루가 어떤 이에게는 아주 부러운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한 번은, 유치원 다닐 나이의 자식이 난치병에
걸린 이웃집 부부가 우리집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우리 부부는 그들에게
술상을 대접했다. 나와 동갑내기지만 돈도 많고, 집도 크고, 해외 여행도
자주 다니는 그 집 아빠가 우리
집의 좁은 거실 바닥에 앉아 내게 이렇게 말했다.
"행복하시겠습니다."
그
말에 난 어떤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 해 쯤 지난 후에
그의 아이는 하늘 나라로 가버렸다.
그는 사랑하는 자식을 저
세상으로 보내는 불행을 겪었는데, 내 딸들은 이렇게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으니 행복한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타인과의
비교는 천국을 만들기도 하고, 지옥을 만들기도 한다. 비교는 우리를
악마로 변신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나의 행복의
척도는 오직 나 자신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단지,
나에겐 당연한 것들이 누구에게나 그러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자꾸 잊어
버리지 말자는 얘기일 뿐이다.
또 얘기하지만, 행복에는 분명히 의무가 있다.
그것을 퍼뜨릴 의무가. 그래서 이렇게 주절주절 이곳에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내게 오늘 수행 일상 쓸 몫으로 신의 영감이 내려오시지 않아도
이렇게 지껄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거리의 전도사들처럼. 내가 나의 행복을 명확하게 눈으로 보고 있듯이 당신도 당신의
행복을 똑바로 쳐다보라고.
바로 지금, 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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