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일기를 공개한다는 것이 자화자찬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각박한 세상
속에서 평화를 찾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자로서
자신의 평화를 보여주고 나누는 것이 무익하지 않으리라 믿고 공개합니다.)
저녁
강의 하러 가느라 내린 전철역에서 인파를 뚥고 계단을 걸어내려오는데,
낯익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외치는 중년 남자. 그를 외면하고 고개를 돌려 길가의 가로수를 보니
5월로 들어서며 파릇파릇해진 여린 잎사귀들이 눈이 부시다. 구원은
그 빛나는 잎사귀 하나에서 이미 받았거늘. 중년 남자의 고성(高聲)을 비껴감에
따라 점점
내 시야를 가득 채워오는 여리디 여리지만 찬란한 이파리들에서 나는 일상의
전율을 느낀다. 감사로 이어지는 전율을.
전철역에서
십여분을 걸어 캠퍼스에 들어와 천오백원 하는 저녁 식사를 맛있게 해치우고
나서 강의까지 남은 여유 시간 동안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오백원 짜리
캔커피를 홀짝인다. 어제부터 다섯 번은 다시 보며 생각을 더한 강의
노트를 한 번 쓱 훑어보고, 출석부의 학생 이름을 또 한 번 외워본다.
하루에 120여명을 상대하느라 도저히 이름들을 외울 수가 없어서 내
디지털 카메라를 가져가 매 클래스 당 단체 사진을 찍어 놓은 덕분에
학생들 이름 암기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강의 직전 점검을 다 마치고
나니 여전히 이십여분 여유가 있다.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벤치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극히 보람 있는 하루의 끝무렵 - 언제나처럼,
그리고 여느 때보다 조금 더 아름답게 빛나는 오늘의 저녁 햇살. 내가
어떻게 신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마 전, 아마 태어나서 처음
나 자신에게 진심으로 이렇게 말했다: "I deserve it [난 이걸(신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어]." 4년여 전 신의
은총을 직접 받았지만, 그리고 그 이후 차츰 내 안의 평화의 영역이
넓어졌지만, 나는 스스로를 신으로부터 어떤 '의무' 또는 '책무'를
부여받은 종과 같이 여겼을 뿐, 그래서 내 자아를 낮춰서 좀 더 낮은
곳으로 가야한다고만 생각하며 살아왔을 뿐, 내가 더 이상의 은혜를
받거나 향유할 자격이 있다는 식으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게 주어지고 있는 은혜를 나 스스로 받을만 하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것이 아마 평생을 통털어서 처음인 것 같다. 윤동주의
서시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라는 말은 예수나 부처나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이제는 내가 감히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필부필부의 한명일 뿐인 내가.
내가
은총을 향유할 자격이 있다는 믿음 - 귀납적 사고의 결론이 아닌 직관적
믿음
- 의 배경엔 내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완벽하게 살고 있다는 터무니 없는 오만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숱한 불완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나에게
주어지는 하루 하루를 항상 완벽을 바라보며 살고 있음을 스스로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학위 주기가 까다롭다고 소문난 대학에서 죽을똥 살똥 육년 여만에
겨우 박사학위를 받을 그때까지도 마음에 줄곳 품고 있었던 바람직한
삶의 이미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유롭고 여유만만하고 느긋한 생활이었다.
그런 생활을 나의 이상향으로 의식적으로 설정한 것이 열네 살 쯤이었으니,
이십년도 훨씬 넘는 세월을 그런 바램을 품어왔다고 할 수 있다. 난
바쁘고 여유없고 일에 몰두한 그런 생활이 매우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내 생활은 바쁜 면에 있어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다.
하루 하루를 보내며 신문 볼 시간도 거의 없고, 텔레비젼도 뉴스만 잠깐
보는 것외에 거의 보지 못한다. 집안일 하고 애들 돌보는 것 이외의 시간
동안은 잠시도 한눈 팔지 않고 일에 파묻혀 있다. 이십여년 품어왔던
이상적인 삶의 이미지를 이제는 스스로 내팽개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매우 바쁘고 쉴틈 없는 나의 생활이 지극히 평화롭고 행복하다. 그리고
오히려 자유롭다. 내 뜻으로, 그 누구의 종용이나 강요도 없이 오직
내 뜻으로 하고 있는 것이므로 오히려 크나큰 자유를 느낀다.
며칠
전 저녁 때 만나 내게 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신 존경하는 길벗께서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다. 사람이 어른이 되어 나이를 좀 먹고 나서 어떤
계기, 즉 나의 초월 체험 같은 계기가 생겨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고
나면, 그때까지는 전혀 몰랐지만, 수많은 전생들을 통해서 내 안에 축적되어온
나의 진정한 모습이 갑자기 드러나고, 그렇게 되면 그때까지와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살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내가 전에는 그렇게 혐오해마지
않았던 바쁘고 여유없는 생활을 이제는 이토록 행복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정말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는
국제기구 관련 행사로 한 열흘간 더욱 바빴다. 그러면서 번역 일, 강의
관련 일, 평소의 공부, 웹싸이트 업데이트 등등을 병행하다보니 한 마디로
눈코 뜰새 없었다. 그러나 그 바쁜 와중에도 나 자신이 거의 일상에
휩쓸리지 않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나와 부딛치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내가 준 무언가를 받은 그들이 보여준 고마움과
신뢰의 눈빛은 나를 며칠이고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받는 것이
아니라 줄 수 있는 것이 은총이다.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몇
주일 전에 나의 학생들에게 감히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인생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냈기에 지극히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그러니 당신들도 먼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라고.
내가 어쩌다 이렇게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고 뻔뻔해졌는지 모르겠다.
감히 나를 모델로 삼으라고 타인들에게 공개적으로 떠들어대다니. 나는
자신의 안으로만 움츠려들던 참으로 연약한 소년이었었는데.... 하지만
숨길 수가 없다, 나의 평화와 행복을. 그래서 그렇게 뻔뻔한 일장연설을
해놓고 나서 몇 주 후에 급기야는, '나는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어'라고
더욱 뻔뻔한 선언까지 스스로에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일주일
후에 대학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작년에 학생들 잘 가르쳤다고. 부상으로
받은 '금일봉'도 매우 반갑기는 했지만, 그보다 나의 내면의
확신이 현상에서 대응된다는 것을 본 것은 더 뜻깊은 일이었다.
5월의
신록은 언제나 내게 삶의 기쁨과 축복을 일러주었다. 신록에서 구원을
찾는 것이 이렇게 쉬운 일인줄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신록과 함께
오늘도 평화롭다.
May Peace Be with You.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