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일이 일어난 것은 80년대 중반 어느 해의 여름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설악산에 캠핑 가기를 즐기던 나는 그 때 이십대의 팔팔한 청년이었고,
배낭 하나만 짊어지고 설악산에 들어가 여러 날 혼자 쏘다니기를 즐기곤
했었다. 그 날도 나는 혼자 내설악에 들어가서 백담산장 부근 계곡 옆에
텐트를 쳤다. 요즘과 달리 그 당시에는 서울서 백담사까지 가는데 하루
해가 꼬박 저물었다. 도로 사정도 나쁘고 차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나 내가 용감하게 혼자 산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일런지 몰라도,
실은 나는 겁이 많아 컴컴한 밤이면 혼자 산길을 걷지도 못한다.
갑자기 등뒤에서 뭔가가 나타나기라도 할 것 같아서 말이다. 그래도
여름에 용대리를 거쳐 내설악에 들어가면 늘 등산객들이 야영을
하고 있었기에, 혼자 가도 그다지 무섭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날은
사정이 달랐다. 백담사 앞 계곡이 수렴동 쪽으로 꺾어지며 물살이 휘감기는
그 멋진 곳에, 그 날은 나 이외의 그 누구도 여장을 푼 사람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직 해가 떨어지기 한참 전에 여장을 푼 나는, 그 날 새벽
네시부터 일어나 상봉동 터미널까지 거대한 배낭을 짊어지고 가는 것으로
시작된 오랜만에 겪은 여행의 피로를 계곡물로 씻어내며 대자연을
흠뻑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언제 와봐도 아름다운 설악산. 혼자 계곡물을
즐긴 후 저녁을 준비했다. 고등어 통조림, 김치, 감자, 양파, 고추,
마늘, 파... 개스버너 위에 올려놓은 코펠 속에선 나 혼자 해치우기엔
조금 과한 양의 저녁 요리가 완성되었다. 텐트 옆에 커다란 돌 하나를
의자 삼아 괴어 놓고 그 위에 앉아 저녁상을 차렸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가 싶더니 계곡에는 갑자기 어둠이 가득 차버렸다.
그런데 그때까지 한 사람도 그 부근에 야영하기 위해 여장을 푸는 이는
없었다. 시커먼 계곡물, 그리고 저 건너 편의 칠흙같이 깊은 숲. 문득
겁이 나기 시작한 나는 재빨리 소주 한 병을 땄다. 술기운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으리라. 혼자 마시는 술은 빨리 없어지고, 사람 또한 빨리
취한다. 밤이 더더욱 깊어가도 여전히 부근에 머무는 사람은 없었고,
이제는 지나치는 등산객의 발길마저도 뚝 끊어진 듯 했다. 나는 연신
스텐레스 식기에 따른 소주를 입속에 털어넣었다. 무서웠다. 이
깊은 산중에 오직 나 혼자 뿐이라는 것이.
그런데, 하늘이 무심하신
것 만은 아니었던지, 갑자기 십수명의 등산객 무리가 바로 내 텐트
옆으로 다가와 짐을 푸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이미 소주
한 병을 치워버리고 두 병째를 비우고 있던 나는 술기운도 돌고 반갑기도
하여 잠시 후 그들에게 다가갔다. 내 또래인 듯 싶은 그들은 남녀 대학생들이었다.
그들 중 한 친구가 자신들은 S대 음대 성악과 학생들이라고 밝혀왔고,
곧 텐트를 치고 저녁 식사를 장만한 그들 역시 술병을 꺼내들었다.
그렇게 나는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그날 밤 꼭지가 돌도록
술을 퍼마셨다. 그들은 성악과 학생들 답게, 술을 마시며 많은 노래를
불렀는데, 그 음성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이것이 천상의 음성인지 지상의
것인지 나는 감탄하느라, 술 마시느라, 함께 웃고 떠드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예의 바르고 친절한 그들은 홀로 외로이 계곡 앞에
앉아 있던 나와 기꺼이 즐거운 하룻 밤을 보내주었다.
다음 날
아침 내가 눈을 뜬 것은 해가 이미 중천에 오른 뒤였다. 폭음 뒤의 타는
듯한 갈증 때문에 더 이상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물도 마시고
소변도 보려고 텐트 밖으로 나오고 나니 그제서야 내가 지난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떠올랐다. 소주를 아마 세 병쯤은 비운 뒤 옆 자리의
음대생 친구들에게 먼저 실례하겠노라며 비틀비틀 내 텐트로 들어와
쓰러져서는 그대로 골아 떨어져 버렸던 일이 기억났다. 한 여름의 따가운
아침 햇살 속에서 나는 그 친구들이 궁금해졌다. 그런데, 이런, 바로
내 텐트에서 2-3미터밖에 안 떨어진 곳에 여러 개의 텐트를 치고 둘러앉아서
놀았던 그 음대생들의 텐트가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니가. 정말 부지런한
친구들이군, 술을 그렇게 퍼마시고도 말야... 아니, 술은 나만 열나게
마셨던가? 그 친구들은 함께 잔은 기울였어도 노래를 많이 불렀었지...
허나 이상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아침이 되었다고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 도무지 그들이 내 옆에서 함께 하룻 밤 캠핑을
했다는 흔적이 아무 것도 남겨져 있지가 않았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 날도 산행을 계속 했다. 도중에 수렴동 산장에서 일하는 아저씨에게
물어 봤다, 내 앞으로 남녀 대학생 십수명이 지나 갔느냐고. 아저씨는
그런 무리는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거 참 이상하다 생각하며 하루
종일 대청봉을 향해 산을 오르다 소청봉 밑의 봉정암 산장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산장은 심하게 붐비지는 않았지만, 내가 독방을 차지할
수 있을 만큼 한가하지도 않아서 나는 한 무리의 등산객들과 작은 방을
나눠 쓰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산장의 밤은 술로 지새게 된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든 그 등산객들은 외로운 나에게 술도 따라주고
안주도 나눠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설악산이 매우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술이
좀 들어간 다음 내가 그들에게 물어 봤다. 오늘 올라오시며 십수명의
대학생 무리를 본적이 없느냐고. 그들 역시 전혀 그런 무리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참 이상하다며 그 무리가 S대 음대 성악과 학생들이라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 불렀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그 말을 듣고 한
아저씨가 내게 말했다.
"S대 음대생이라구요? 몇 년 전에
S대 음대생 십여 명이 단체로 등산 왔다가 급류에 휩쓸려서 몰살당했던
일은 있었지요. 오늘은 그런 팀은 전혀 못봤는데."
순간
나는
그 음대생들 중 어느 한 명의 얼굴도 기억해낼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마치 그들은 진짜가 아니라는 듯이. 그들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여전히 기억이 나는데도.
Epilogue
그
여름이 지나고 몇 년 뒤에 나는 또 한 번 같은 코스로 설악산을 혼자
넘었다. 웬만해선 산 속에서 혼자 텐트 치고 자지 않게 되어버린 나는
꼭 산장에서 숙박하며 산을 넘었다. 중청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지샐
때, 자칭 설악산의 도사라는 육십 대 산사나이, 아니 산할아버지께서
나와 술잔을 기울이다 이런 말을 해주었다.
"백담사 앞
계곡 말야, 거기가 내설악에서도 귀신이 젤루 많은 데야."
-------------------------------------------------------------------------------------------
오늘의
교훈 (1) '믿거나 말거나'의 영역(英譯)은 'Believe it or not.'
(2)
세상 천지간의 모든 일을 다 이해하려는 헛수고는 하지 말 것.
(3)
친절한 귀신도 있을런지 모른다.
(4)
Just for the fun of it.
©
2003 Dr. Han's Faith Site. All rights reserve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