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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직
지원했던 대학의 임용에서 탈락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바로 이번
학기의 마지막 강의에 들어가서 160분 동안 두 시간 열강하고 나와서
귀가하는 늦은 밤, 월급이 다달이 통장에 입급되는 황홀한 꿈을 포기하고
나니 잠시나마 겨울 바람에 가슴이 시려옴을 느끼며 순간적으로 제
꼴을 동정하는 한심한 감상에 젖었다 빠져나온다; 내 감상의 사치를
조소하듯 주변에 만연되어 있는 세상의 비참함에 퍼뜩 정신이 깨어
스스로의 경박함을 꾸짖는다; 가족들은 이미 잠든 밤, 잠깐 까먹고
있었던 삶의 목적을 새삼 기억해내며 나름대로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려 캔맥주를 식도로 흘러보내다가, 텔레비전 대신 보고 있던 묵은 신문에서
한 지혜로운 노인의 축복받은 통찰을 주섬주섬 읽고는 가슴 두근거리는
삶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미소를 지어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끄적여
본다.)
IMF 구조조정으로 나라가 몸살을 앓던 99년 무렵, 우리
동네 주차장에서 한 남자를 보았다. 식솔이 딸렸을 듯한 나이의 남루한
옷차림을 한 그는 한 여름의 뙤약볕으로 달아오른 주차장 한 복판에서
무언가를 행인들에게 팔고 있었다. 그 때에는 그런 사람들이 거리에
꽤 많았었다 - 최근 들어 또 다시 증가하고 있지만. 그때 난 그의 눈을
잠시 볼 수 있었다. 그도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성난 그의 눈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마치 나를 꿰뚫고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는데, 그 눈동자는 하늘에 대한 분노로 이글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의 고통이 내 가슴에 느껴져 왔다. 그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가 식솔을 거느리고 직장을 잃은 고달픈 가장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까뮈의 이방인에서 살인을 유도하는 강렬한 태양과도
같이 그날의 태양은 그의 분노가 몸 밖으로 마구 삐져 나오도록 충동질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시무시한 분노로 터질 것만 같은 그 남자의
어쩔 수 없이 자제된 판매 행위가 무섭기도 했고 또 동시에 측은했다.
그에게 제발 축복 있기를, 나는 지나치며 빌었었다. 난 그때 예쁘게
차려입은 딸애를 품에 안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에게 미안했다. 나는
그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다, 기도 밖에는.
요즘 들어 지하철에서
외판원들을 자주 본다. 대개 삼십대서부터 오십대 정도의 고단한 행색을
한 남자들. 이미 사람들 시선에 대한 수치심 정도는 초월해버린 채,
상품 설명을 외치며 아침부터 밤까지 이 열차에서 저 열차로 도시의
땅 밑을 누비는 그들. 나는 소음에 특히 민감하지만 그들이 외쳐대는
소리에 대해서는 감히 불쾌감 따위가 내 마음 속에서 형성되는 무엄함을
용납할 수가 없다. 그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그렇다고 그들이
제시하는 알량한 제품들에 흥미를 표시하지도 못하며, 그저 그렇게 무기력하게
그들이 지나쳐가기만 바라고 앉아 있는다. 그들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가 식솔을 거느리고 직장을 잃은 고달픈 가장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의 땅굴 속을 왼종일 쑤시고 다니다 귀가하는 그들에게는
자신을 반가이 맞아줄 사랑하는 가족이 있을까? 제발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기를...
서울역의 한쪽 구석인 서부역 부근이라든가 지하철
회현역이나 을지로3가역을 지나다 보면 노숙자 무리를 보게 된다. 겨울이
되면 지하도를 지날 때 얼굴에 와 부딛치는 기분 나쁜 땅밑의 바람이
메마른 악취를 실어 나른다. 나와 똑같이 피와 살과 뼈와 사랑으로 만들어졌으나,
차디찬 콩크리트 바닥 위에 종이 박스 몇 장 깔고는 웅크린 채 누워있는
사람들에게서 풍기는 악취. 노숙자 무리를 지나치는 사람치고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는 이는 없는 것 같다. 아마 다들 나처럼 그들을 바라보기엔
너무도 미안해서일까... 내 두터운 코트가, 따스한 터틀넥 셔츠가, 포근한
'골뎅' 바지가, 편안한 '랜드로바'가, 지폐가 여러 장 들어있는 지갑이
미안해서, 고개를 숙인 채 빨리 그들을 지나쳐버리려 한다. 그들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가 식솔을 거느리고 직장을 잃은 고달픈
가장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는 이제 돌아갈 가정이라도
남아있을까? 아마 없을 것 같다...
깊은 차원에서는, 그들의
길이, 그들의 가혹한 운명이, 그들의 타고 난 기구한 '팔자'가 그들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음을 믿는다. 깊은 차원에서는, 나의 길이, 나의
관대한 운명이, 나의 타고난 행복한 '팔자'가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음을
믿는다. 그들이 나에게 동정을 받고, 내가 그들을 동정하는 것도 다
윤회의 우주에서 완벽하게 기획된 것임을 믿는다. 내가 죄의식을 느껴야
할 당위성 같은 건 워낙에 없는 것일 게다. 세상의 악과 추함과 결핍과
불행과 슬픔과 고통과 모든 비극은 다 그럴만 한 이유가 있어서 있는
것들이다. 완벽한 계획의 필수적인 부분들로서. 그것들에 관해서 내가
무엇을 하건 말건, 꼭 해야할 절대적으로 옳은 행위 같은 건 워낙에
없는 것일 게다. 정말 그런가?
헌데, 원로 연극배우 박정자는
신문 칼럼에서 다음과 같은 원숙한 삶의 지혜를 전해준다:
"소설가는
소설을 쓰는 것으로 독자들의 성장을 돕는다. 건축가는 건축으로, 가수는
노래로 다른 사람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연극배우는
.... 관객과 함께 있는 동안의 시간과 공간을 서로 완벽하게 나눌 수
있다. 그때 나는 '나의 삶인 그들의 삶, 그들의 것인 나의 것'이라는
합일을 느낀다 .... 얼마 전, 온 몸이 마비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발가락 하나를 움직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다. 단지 발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데 전 존재를 바치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내가 연극을
통해 원했던 게 거창한 게 아니었다는 진실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사지가
마비된 그 사람에게 발가락 하나만을 움직이게 만드는 만큼의 힘을 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 나는 [한 연극의 주인공인 80세의]
모드가 19세 헤럴드에게 주는 사랑과 지혜를 관객에게
나누어주고 싶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19세의 젊은이들에게 삶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을 선물하고 싶었다 .... 모드처럼 멋진 할머니가 많았으면
좋겠다. 아름다움을 보고, 낙조라든가 갈매기를 보고 울 수 있는 할머니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내가 그녀를 보며 예순둘에 새로운 꿈을 가질 수 있었던
것처럼."
(중앙일보, 2003.12.10)
단순한 물질적 자선의 차원을 넘어서는
진정한 보시가 어떤 형태이어야 할지에 대한 알아듣기 쉬운 제언이다.
그것은 '나의 최고를 드러내주는 재능을 사용하여 다른 이들에게도 자신의
최고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바로,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추운 겨울이
되면, 내가 이웃과 사랑을 나눈답시고 하고 있는 알량한 선행의
초라함이 자꾸만 자꾸만 부끄럽기만 하다. 그래서 자꾸만 기도만
해댄다. 주님, 나의 사랑하는 주님이시여, 이 땅에 평화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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