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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의 한 학기가 끝나는 종강일에, 장차 교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은 학생들에게
선생으로서의 애프터
서비스를 약속한다. 나와 헤어지더라도, 앞으로 나의 도움이 필요하면,
특히 교육의 길로 들어서면서 어려움과 맞닥뜨리게 되면 나를 기억하고
연락을 하라고 말해준다. 내가 특별히 교육현실에 대해서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으리라고 믿어서가 아니다. 아무 도움도 못준다 하여도, 그저 제자들의
음성에 귀기울여주기 위하여 한 곳에 계속 버티고 있기라도 해야할
것이 아닌가 싶어서이다. 학생들을 떠나보내고 한 해, 두 해가 지나다
보면 가끔 제자로부터 연락이 오는 일이 있다. 대개는 고민 상담이고,
나는 성심성의껏 그 상담에 응해주곤 한다. 때로는 몇 년전에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 조금 무리한 부탁을 청해오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에도, 애초에 애프터 서비스를 약속했던 연유로,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도움을 주려고는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학점이
필요했을 때는 마치 나를 영원한 스승으로 모실 듯 하더니만, 그 동안
연락 한 통 없다가 아쉬운 것 생기니까 그제서야 연락을 하는구먼.'
딱히 그 제자의 태도에 큰 불만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럴 경우 나의 즉각적인 반응은 약간 부정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나에게도 스승은 많으시다. 미국에서 박사과정 때 나를
지도해주신 은사들은 학계의 거장들이었을 뿐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매우
존경스러운 분들이었다. 공과 사가 때로 모호해지는 우리 사회와는 달리,
서양인들은 그 구분을 칼같이 엄격하게 하는 냉정한 면이 분명히
있지만, 나의 스승들 역시 그러하셨다. 어떤 편애도 특별 배려도 안해주시지만
나의 지적(知的)인 진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길잡이를 해주시는 철저한
자세를 나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사 논문 구상 초기에 지도교수께서
해주신 말씀은, 학문의 자세에 어떠한 나태나 얼버무림도 있어서는 안되리라는
엄중한 가르침으로 내 뇌리에 각인되었었다. 즉, 박사 논문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지식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must contribute to knowledge)는
말씀이었다. 너무도 단순하지만, 정말로 본질적인 지침 아닌가. 경고와도
같은 그 가르침 덕분에 나는 논문을 쓰는 동안 대충 대충 넘어가고 싶은
유혹과 싸우며 나아갈 수 있었다.
졸업 후 이메일 한 번밖에
못 보내드린 지도교수께 2년 여만에 이메일을 또 보냈다. 지난 번에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내게 아쉬운 일이 생겨서였다. 답신을 기다렸건만
2주일이 지나도록 오지 않기에 항공우편 편으로도 편지를 보냈으나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별 수 없이 지금은 정년 퇴직하신 또 다른 교수께 이메일을
보냈더니, 이번에는 바로 다음 날로 답신이 날아왔다. 4년 만에 내 소식을
들어 매우 반가웠고, 또 내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기꺼이 주겠으니 구체적
사항만 알려달라는 말씀이셨다. 그리고 답신을 못보내고 있는 나의 지도교수는
현재 유럽에서 장기 여행 중이라고 알려주셨다. 고마운 마음에 나는
또 바로 답 메일을 보냈다. 실은 그동안 연락도 못드리다가 이렇게 불쑥
내가 아쉬울 때나 연락을 드리게 되어 몹시 송구스럽다는 말과 함께.
그러자 스승께서는 바로 또 이런 답신을 보내셨다: '제자가 연락을
해오는 것은 물론 반가운 일이지만, 연락이 없다고 해서 사제지간의
인연이 끊기는 것은 아니며, 연락을 못했다고 죄의식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 그리고 선생의 제자에 대한 의무는 평생토록 가는 것이다.' 프로페셔널리즘,
사명감, 그리고 사제지간의 정 등이 분리되지 않고 결합되어 있는
미국인 스승님의 그 말씀은 나를 몹시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
다음 날, 연락이 없던 지도교수님으로부터도 답신이 당도했다. 답신에는, 내
근황을 알게 되어 정말 반가우며, 내가 필요로 하는 도움은 무엇이든지
힘 닿는 데까지 주겠다는 말씀이 담겨 있었다. 또 한 번 감사했고, 그리고
부끄러웠다. 스승님의 곁을 떠난 뒤로는 연락도 제대로 안드리다가 저
아쉬운 일 생겼을 때 부탁이나 하는 제자인 나, 그리고 제 곁을
떠난 제자가 연락 한 번 없다가 자기 아쉬운 일 생겼다고 부탁해오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는 나.
큰 일이다, 이번 학기에도 종반에는
진정한 교사상 - 師道 - 에 관해 이 꼬락서니에 떠들어야 하는데, 이
경박한 내 꼬라지를 어느 사이에 스승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가
있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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