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요즘 보고 읽은 것들에 대한 단상(斷想) (2003/1/11)

1.
열살 때쯤 폭 빠져서 읽었던 기막히게 재미있는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또 영화화 되었다. 이 최신판을 비디오로 빌려다 보고 있노라니, 명작이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 구석구석을 여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단순히 통쾌한 복수극이라는 통속적 장르에 분류시킬 수 없는 많은 이유중의 하나로, 이 소설이 나의 내면에 숨겨져있는 최악의 모습과 최선의 모습 둘 다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에드몽 당테스의 잔인한 복수를 바라보며, 왼뺨을 맞고 오른뺨을 내놓기는 커녕 가해자의 뺨을 돌려차기로 날려 버리는 데서 통쾌함을 맛본다. 순진한 청년을 파멸시킨 악한 사회에 대한 그의 보복 행각이 내 내면에 죽어 있었던 유치무쌍한 피해의식 - 순진한 나를 집어 삼키려던 '악한 사회'와 '사악한 놈들'이 저기 있다는 - 을 부활시키고, 당테스가 내 복수까지 해주고 있다는 착각이 발생한다. 나의 내면의 최악이 드러난다 (訂定: 내 내면에는 이 정도는 뛰어넘는 더한 '최악' 수두룩함). 그러나 당테스가 자신의 복수 행각에 회의를 느끼고 인생을 위하여 진실로 무슨 가치있는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조금씩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최선의 면모가 함께 드러남을 느낄 수 있다. 주인공의 핏발선 복수의 눈동자가 서서히 평화의 눈동자로 바뀌는 모습을 보며 내 마음도 편해짐을 느낀다.

2.
아이들 그림책 흥부놀부 이야기를 한 번 봤다. 흥부라는 인간형은 자신의 최고의 속성 - 또는 '사랑'에서 우러난 행동 - 을 일관되게 밖으로 드러내는 인물이라 볼 수 있다. 그에게 베풀어지는 제비의 박씨라는 보상은, '보상'이라기 보다는 한 사람이 자신의 최고를 끊임없이 드러내는 삶이 가져오는 당연한 귀결로써 발생한다. 삶이라는 것이 내면의 신성(神性)을 드러내는 여정이고, 그런 일관된 신성의 드러냄은 최선의 결과를 부산물로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이해를 이 설화에서 읽을 수 있다. 1960년대에 우리 나라 교육학계의 거두인 정범모 교수가 독특한 '놀부론'을 주창한 일이 있었다.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인간형으로 놀부를 부각시키고 놀부의 '진취적'이고 '합리적'인 성향을 옹호하는 논지였다. 결국, 서구에서 일어난 '현대화(modernization)' 또는 현대성(modernity)의 획득에 적합한 인간형은 놀부일 수밖에 없는가 보다. 자신의 최고의 속성인 사랑을 드러내는 인물 흥부는 현대에는 부적합한 인물일 수밖에 없고. 우리의 최선을 드러내는 것에 제재를 가하는 '현대성'이란 것은, 그래서 지극히 제한된 전환기적인 문명 모델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20세기에 서양이 동양으로 눈을 돌린 것을 이해할 수도 있을 성 싶다. '현대'가 끝나고 '탈현대'로 넘어와서 천만 다행이다.

3.
아이들 전래동화 CD인 '재주많은 다섯친구'를 네살박이 딸내미와 함께 봤다. 각기 뚜렷한 재능을 가진 다섯 어린이가 모험의 길에 나선다는 이야기다. 힘이 장사인 아이, 콧김이 아주 센 아이, 엄청난 양의 오줌을 누는 아이, 배를 등에 지고 다니는 아이, 그리고 거대한 무쇠신을 신고 다니는 아이 등 다섯 아이들이 호랑이 무리를 만나서 위기에 빠지지만, 각자의 재능을 완벽하게 발휘해서 난국을 헤쳐나온다는 유쾌한 이야기다. 아니,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각자의 재능을 최대한도로 발휘할 수 있는 완벽한 정황이 주어졌기 때문에 난국을 헤쳐나왔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내가 두서없이 평생 쌓아온 이런 저런 능력이나 재주, 또는 성향들 전부를 최대한도로 써먹을 수 있는 완벽한 정황이 내 앞길에 나타날 것임을 믿는다. 어린이 동화처럼. 그래서 내 인생 전체라는 거대한 커리큘럼이 신께서 괜히 애쓰신 헛수고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 다섯 아이가 각자의 재능을 완벽하게 발휘할 완벽한 시츄에이션을 만났듯이.

이런 믿음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는 언제나 인기가 높다. 각기 독특한 능력이나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그 재주를 펼쳐볼 완벽한 기회에 접한다는 류의 이야기들: 뒤마의 삼총사, 쿠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와 이것을 따라한 황야의 7인, 미션 임파써블(TV의 '제5전선'), 만화 무적 009, 반지의 제왕 등등.... 나는 이런 류의 스토리의 특성이 다양한 재능의 집합에 있다기 보다는, 그 다양한 재주를 다 제대로 써볼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진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는 그런 상황을 보기가 어렵지 않은가? 재주들은 있어도 써먹지를 못한다는 푸념이 많은 걸 보면... 나는 그 재주들을 써먹을 완벽한 기회를 내가 만든다는 믿음을 갖고 산다.

4.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을 DVD로 사서 큰애와 컴퓨터 스크린으로 봤다. 두 번째 보고나니 참 이상한 점이 있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녀 치이로가 유령계에 들어가서 부모를 구출하기 위한 결의를 한 이후에 갑자기 수퍼걸이 되 버린 점이 그것이다. 초능력이 생겼다든가 뭐 그런 것은 전혀 아니지만, 내적으로, 두려움이 조금도 없고 마치 '현상계'를 초월한 듯한 초연하고 쿨~한 인간이 되 버린 것이다.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심지어는 무심한 표정으로 귀신들 잡아먹는 괴물(밑의 그림)을 유인해서 복종시키는 장면에서는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디지털 세상을 꿰뚫어볼 수 있게된 주인공 네오가 적의 공격을 귀챦은 듯이 한 손으로 막는 것을 보는 것과도 같았다. 이밖에도 설명하기 어려운 치이로의 변화가 여럿 있는데, 부모를 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친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귀한 약을 주저없이 써 버린다든지, 마지막 장면에서 똑같이 생긴 돼지들의 정체를 불가사의하게도 구별해낼줄 안다든지 하는 점 등이다. 내 생각에는 하야오 감독이, 치이로라는 소녀를 통해서 자신의 신성(神性)을 발견해내는 영혼의 순수성을 예시한 것 같다. 소녀는 자신의 신성을 발견하고 현상계의 덧없음을 깨닫는다. 심지어는 '내일 부모를 살리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 내 눈앞의 친구를 살리는 것'을 직관적으로 선택하기까지 한다. 관념 앞에서 자유롭고 오직 본질만 꿰뚫어보는 능력을 가진 소녀. 이런 관점에서 다시 한 번 볼까 한다. 걸작이다. 벼라별 해석 - 나의 것 같은 - 을 다 유발시키는 것이 걸작의 특징 아니겠는가.

'수행일상 2003'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