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2004/8/28)
 

술을 끊었다. 주변에 억측이 난무한다. 그만큼 내가 소문난 애주가였다는 말일 게다. 대표적인 억측으로는, 내가 술을 마시다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임에 틀림없다는 추측들이 자리잡고 있다. 상상력이 풍부한 나의 이웃 술벗들은 자신들이 경험했던 최악의 케이스들을 조심스레 나에게 적용해본다. 한 사람은 얼마 전에 만취하여 노래방에서 홀연히 구두를 벗고는, 그 구두 두 짝을 양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 맨발로 귀가하였다 한다. 그런 모습으로 귀가한 이유를 부인이 물은 바, '구두를 잃어버릴까봐서'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또 한 사람은 과거에 정장을 하고 술을 마셨는데, 다음 날 아침 하의만이 벗겨진 채로 발견되었던 가슴 아픈 미스테리에 관해 말해주었다. 약간의 문학적 조합이 기도된 끝에, 내가 만취하여 노래방에서 구두를 양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 하의를 벗은 채로 놀아제끼다가 마침 만나게 된 도우미 아줌마가 나의 첫사랑이었고, 이에 내가 크나큰 쇼크를 먹고 술을 혐오하게 되지 않았는가 하는데까지 상상력이 확장되었다.

물론 이번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술을 끊는다는 선언을 한 배경에는 한 번의 폭음에 대한 후회가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기는 하지만, 그 밖에도 세월을 통하여 축적되어온 다양한 원인들이 있으며, 나는 술먹고 노래방에 가서 도우미 아줌마를 만난 일도 없다. (실제로 나의 친구들은 어쩌다 여성이 접대하는 술집으로 나를 끌고갈 때에도 나를 목사님 취급하여 여자 옆에 앉혀주지도 않는다.)

아무튼 그간 나의 삶과 일상에서 술이 차지해온 상당한 비중을 고려하여, 이제 그 술을 떠나보내며 이별의 글월 한 줄 남기고 싶은 마음으로, 이러한 결별까지 오게된 여정을 조금 곱씹어보고 싶은 심정이랄까.

우리 집안은 대대로 소문난 애주가 집안이었다. 옛적에 부유한 지주 집안 출신이셨으며 출판 사업을 하셨던 조부께서는 서울 중심가의 자택에서 연일 주연을 벌이시어, 장안의 문인, 예인들 발길이 끊길 날이 없었다는 것이 우리 집안에 내려오는 전설이다. 전쟁 통에 집안이 폭삭 망하여 과거의 영화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지만, 오직 술에 대한 사랑만은 집안 어르신들을 통하여 면면히 후대에까지 이어져 왔다. 내가 어릴 때부터 기억하는 어른들의 모임은 의례 술자리였고, 결국 십대 때부터 술을 시작하여, 어린 나이에 어르신들로부터 술을 받자와 소주병을 가볍게 비우게 된 나를 바라보시던 어르신들 눈빛에는 힐난은커녕, '역시 내 핏줄이여'하는 기특히 여기심만이 가득하였던 것을 이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대학을 들어간 것은 캠퍼스 주변에 최루탄 내음과 알코올기가 진하게 쩔어있었던 팔십년대 초반. 나는 대학은 술마시러 들어간 곳인 줄로 알았다. 아, 이렇게 지금부터 피나는 수련을 쌓아두어야 직장다니는 선배님들처럼 매일 퍼마시면서도 살아남는 역량을 기를 수 있는가보다... 행인지 불행인지 곧 미국으로 떠났으나, 그곳에서 조우하게 된 동포 친구들 역시 당시 고국의 대학가 분위기를 고스란히 이민가방에 꾸려서 건너온 인물들이었고, 나는 공부하느라 바쁜 나날들 속에서도 음주계의 다크호스로 한 때 명성을 드날렸다. 그렇게 자리잡은 나의 음주 생활, 그후로 큰 변화없이 유지되어 왔음을 증언한다.

나는 주량이 아주 많지는 않으나, '애주'에 있어서는 상위급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나는 술을 통해 모난 내 성격을 많이 부드럽게도 만들었고, 내향성을 뛰어넘고 타인들과 흉금을 터놓은 교류를 할 수 있었으며, 적당한 취기 속에서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감흥을 얻는 걸 즐기기도 하였다.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지도 않으며, 유쾌한 대화를 즐기고, 따라서 '망가지는' 일도 없기 때문에, 나의 여러 술벗들과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애주의 역사를 써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즐거움을 접기로 했다. 단, 사회생활을 위해서 '딱 한 잔(소주든 맥주든 - 폭탄주 제외)'은 받아서 홀짝이겠다는 원칙만 정해놓고; 어제도 동창 상가(喪家)에 가서 소주 한 잔 받아놓고 세 시간을 앉아있다 왔다.

술을 끊는다는 것을 나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갑작스런 일이다. 술을 매우 즐겼고 술과 함께 하는 분위기를 즐겼다. 그것이 끊어진지 약 삼주일이 지난 지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단지 오랜 시간 우정을 쌓아온 술벗들 여럿 울린 것이 가슴 아플 뿐. 다행히도 나는 알콜 중독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5년 여전, 담배를 끊는 것은 정말 힘들었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 당시, 신을 만나는 체험 후,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자는 돌연스런 자각으로 인하여 고3 때부터 즐겼던 담배를 끊어버렸었다. 그리고는 나를 엄습한 금단현상과 싸우느라 엄청나게 힘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 담배를 버린 공허한 내 심신을 달래준 것이 독한 양주였다. 신을 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연유로 하루의 대부분을 기도로 보내고 있었던 그 당시, 담배가 빠져나간 허전함과 금단현상을 견디기 어려워, 밤이 되면 양주 몇 잔을 입안에 털어놓고 잠을 청하곤 했다. 하루 종일 기도하다 자기 전에 술로 스스로를 달랜다는 건 지금 생각해봐도 웃기는 일이다.

술과 담배, 안해본 이는 모르겠으나, 푹 빠져있던 이로선 결코 쉽게 버릴 수가 없는 것들. 그것들이 미치는 건강의 해악이 심각하기도 하지만, 그것들에 대한 내 마음의 의존성 그 자체가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무엇에 의존한다는 자체가 나의 자유의 제한이다. 물론 엄격한 절제와 지혜로운 활용이 가능하다면 술을 약간 즐기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과 벗하는 풍류의 멋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허나 술은 때때로 나를 이긴다. 나의 자제력과 지혜가 술 앞에서 무너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좀 더 자유롭기 위하여, 그리고 내 정신이 화학성분에 굴복하는 꼴을 보지 않기 위하여 이제 술을 끊나노니, 그간 나와 벗하여 숱한 아름다운 추억과 간헐적인 - 인간적인 - 추태를 빚어주었던 술아, 이제 그만 헤어지자, 그동안 즐거웠다. (그냥 한 잔씩만 만나자.)

그간 소주, 맥주, 막걸리로 쏠쏠히 매상 올려드린 우리동네 구멍가게 주인 아저씨께도 좀 미안하긴 하군.

내가 의지는 좀 굳은 편이라 한 번 작정한 걸 파기하진 않지만, 혹시 이러다가 다시 술을 마시게 된다면, 글세... 그때는 아마 내가 득도해서 주선(酒仙)이 되(려는 흉내를 내고 있)든지, 아니면 날개가 부러져 추락했든지 둘 중의 하나이겠지. 주님, 후자는 피하도록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