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사랑, 그리고 효(孝) (2004/2/7)
 

이웃집의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여자 애가 지극 정성으로 자기의 병든 아빠 수발을 들더라는 얘기를 아내가 해줬다. 그 아이보다 한 살 더 먹은 우리 딸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냐는 사족을 달면서. 그러냐고 대꾸하곤 내 일 보러 방에 들어와 앉아 있는데, 조금 있다가 아내가 다시 내게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자기는 안됐수." 뭐가 갑자기 안됐냐며 의아해 했더니, 제 엄마로부터 그 나어린 '효녀' 얘기를 전해들은 우리 첫째 딸이 이렇게 대답했더라는 것이다: "걔 하녀래?" - 딸이 애비를 돌본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내가 아내에게 답해줬다: "애가 무슨 잘못이 있어, 다 지 애비 에미 하는 거 보고 배우는 거지." 이 말을 들은 아내도 수긍했다, 맞아, 우린 뭐 우리 부모님들께 잘해드리는 게 있다구...

어쩌다 내가 효자인줄 오해하는 친지도 있긴 하지만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내가 불효자라는 걸. 우리 나라에선 '효 사상'이라고까지 지칭하며, 선조로부터 물려 받은 이 부모공경의 정신을 숭상하는데, 난 이 '효 사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생물학적이고 사회과학적인 비판적 시각에 입각한 경박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궁극적으로 제 피붙이만 위하고 전통적인 위계질서를 고수하자는 정치적, 문화적 심산에서 나온 '사상' 아니냐는 경박한 의견). 그렇다고 불효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효라는 게 그다지도 지고지순한 가치로서 숭상될 것까지야 있느냐는 의견이라고나 할까. 이 따위 의견을 가지고 있는 내가 효자일 리는 당연히 없다.

자식 낳아서 키워봐야 부모 마음 이해한다고 했던가. 집안 청소 '수행' 하느라 출근이 늦어진 날, 오전 내내 만화 비디오 한 편 다 떼고 딩굴거리던 둘째가 갑자기 아이스크림 타령이다. 아까 떼쓴다고 야단친 것도 마음에 걸리고 하여 심약해진 터라 곧 사다주겠노라 약속했다. '수행' 다 마치고 출근하러 집을 나와 자가용(자전거)을 몰고 동네 구멍가게로 가서 아이스크림을 한 꾸러미 사다가 둘째가 좋아하는 '상어 아이스크림(죠스바)'을 엥겨주었다. 오백원 짜리 하나에 퐁퐁 뛰며 좋아하는 나의 싸구려 딸내미. 그 웃는 모습 보기 위해서라면 그깟 오백원 짜리 언제고 못 사다줄까.

내가 나의 자식들만 했을 때, 1960년대 말쯤, 아직 대한민국이란 곳이 전체적으로 대략 가난했을 무렵, 샐러리맨이셨던 나의 부친은 늘 회사일로 바쁘시어 얼굴 한 번 뵙기가 어려웠었다. 어쩌다 늦은 밤 잠들었던 눈을 비벼 뜨고 본 아버지는 거나하게 술에 취해 계셨고 - 회사의 접대 일로. 그런데 아버지는 약주가 좀 덜 되셨던 날 밤에 가끔 가게에 들러 '특식'을 손수 사가지고 들어오셨으니, 아버지 손에 들려있던 비닐 봉투 안에는 콜라와 사이다 각 한 병씩과 새하아얀 아이스크림 한 통이 들어있었다. 오밤중에 마시던 콜라의 맛은 어찌나 환상적이었던지. 요즘 배스킨라빈스 같은 곳의 작은 종이컵 하나 정도 될 그 아이스크림을 동생과 싸우듯이 종이 맛 우러날 때까지 박박 긁어먹곤 했었다. 그렇게 걸신들린 강아지들처럼 먹고 있는 우리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아버지의 큰 즐거움이었음을 나는 그때도 알고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들 키우고 있는 내가 지금 어찌 그걸 모를까.

자신을 온통 다 바쳐서 그저 자식이 편하고 잘되기만을 바라는 부모의 사랑이란 것, 제 아무리 생물학적으로 그 이기적 근저가 설명이 된다고 한들, 인간적으로 어찌 그 순수함과 위대함을 거부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커다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라는 효 사상을 어찌 폄하하고 비판할 수 있을까. 효에 대하여 경박한 의견이나 가지고 있는 나같은 덜 된 인간도 제 손으로 자식을 키워보면 부모 사랑의 강력함을 잘 알게 된다.

그러나, 부모의 자식 사랑이 가지고 있는 그 강력함으로 인해, 그 순수함과 위대함으로 인해, 자식뿐 아니라 사회에게도 파괴적인 에너지가 흘러나올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지만, 당연히 나의 부모도 자식에게 실수하신 적이 있었다. 십대 초반 쯤, 여름에 어느 해수욕장으로 온 가족이 놀러가서 소박하지만 깔끔한 여관에 머문 적이 있었다. 하루 저녁은 부근의 가장 큰 호텔로 다 함께 구경을 갔었는데, 그곳 로비에는 당시로서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화려한 서양식 이브닝 가운을 입은 부티나는 우리 또래 아이들이 우아하게 소파에 앉아 쥬스 같은 걸 마시고 있었다. 나와 동생은 신기해서 그저 무심코 그 애들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런 우리를 보고 아버지가 상기된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얘들아, 너희도 이런 데 와서 자고 싶니? 우리도 이리로 올까?" 나와 동생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아버지의 제안을 묵살해버렸다. 나는 그때 비록 어렸지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내가 원하는 것이 결코 물질적인 화려함과 사치가 아니라는 것과, 또 그런 것을 자식들에게 제공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죄의식을 느끼는 아버지의 태도가 분명히 잘못 됐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리사욕의 추구와 거리가 먼 분으로 사회적 정평이 나있는 나의 부친마저도 자식들 눈길을 읽을 때에는 그렇게 이성을 잃으셨던 것이다.

"나라고 왜 내 새끼들만은 최고로 해주고 싶지 않겠는가!"라고 외치지 말라. 조금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니까. 나는 내 새끼들 최고로 해주고 싶지 않다. 내가 자식 사랑이 부족해서? 그건 아닐 것이다. 나는 내 자식들이 자신들의 재능과 사랑을 최고로 발휘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그것과 애비인 내가 물질적, 금전적으로 최고 수준의 혜택을 제공해주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내가 딸에게 배스킨라빈스 사줄 돈이 아까워 오백원짜리 죠스바를 사줄 정도의 형편없는 애비인가? 그건 아니다. 내 사랑하는 딸도 제 애비처럼 적은 것, 작은 것, 소박한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행복할줄을 알기를 바랄 뿐이다. 오백원에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어린 아이의 특권이다. 세상이 다 칭송해마지 않는 "부자 아빠"가 자식들을 초특급 호텔에서 재우는 것이 나는 부럽지 않다. 바다에 놀러 갔으면 파도와 바다내음과 모래와 태양을 흠뻑 즐기면 되는 것이다. 돈 많은 부자 아빠와 그 아이들의 삶은 그들의 삶이고, 그들의 고급스러운 삶은 그것 나름대로 보기에 좋고, 그럴 수 있는 그들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러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그러하지 아니하는 나의 삶은 나름대로 아름답고 축복받은 것이어서, 나는 자식들에게 아무 것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내 자식의 교육만은 최고로 대줘야 한다는 것 역시 조금도 자랑스러운 것 아니다. 대체 '최고'가 무엇인가? 끝없는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 최고인가? 무엇을 위해서? 부모의 허영을 위해서? 허영과 사랑을 혼동하는 부모가 많다. 나는 대단한 과외다 학원이다 대주지 않고 가능하면 그런 '사교육'의 비중을 극소화하려는 나 자신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사교육'을 줄여 아예 시골 학교에 보내며 전원생활할 용기가 없는 것이 부끄러우면 부끄러웠지.

현자들도 말하듯이, 자식 사랑이란 결국 자식을 자유롭게 풀어놓아주는 것을 목표삼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걸 잘 못하는 편이다. 몇 해전, '접신'한 후 주변에서 온갖 기적이 연속적으로 발생했을 때, 심지어는 백화점의 부부동반 태국여행 공짜 티켓까지 당첨된 적이 있었지만, 차마 아이를 떼놓고 갈 수가 없어 몇 백만원 짜리 티켓을 포기했던 적도 있고, 장모님이 둘째 애를 봐주신다고 편하게 큰 애만 데리고 여행 다녀오라 하셔도 둘째만 떼어놓고 가기가 싫어 여행도 안 가고, 베이비시터 한 번 불러본 적도 없고... 그렇다. 허나 놓아줘야 한다는 것 잘 안다. 특히 부모의 자아의 욕심과 허영이라는 꾀죄죄한 울타리로부터 풀어놓아 주어야 아이들의 참 자아가 쑥쑥 밖으로 자라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부모의 사랑이 강력하고 또 어느 정도 순수하기까지 한 만큼, 마구잡이로 휘둘러도 괜챦은 그 무엇이 아니다. 강력함은 파괴적 힘으로 변형될 수 있고, 순수함은 쉽게 다른 색으로 물들어버릴 수 있다. 나의 내 자식에 대한 사랑이 다른 부모의 제 자식에 대한 사랑과 평등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저 부모와 나와 물질적으로, 재산이, 학력이, 지위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고(그런 것들은 에픽테투스의 말처럼 우리가 쉽사리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아니므로), 저 부모와 나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평등하다는 말이다. 숱한 외양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 똑같은 신의 자손이므로. 바로 이 점에서 '효 사상' 또한 출발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내 부모 중한 만큼 남의 부모도 중히 여기고, 부모 중히 여기는 우리 모두의 그 마음을 조용히 내면에서 기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옛부터 내려온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이념적 교화의 도구로 뒤틀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