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이 천국? (2004/4/11)
 

신문에 한-이라크 친선 축구 경기를 생중계한 이라크 TV방송팀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태권도와 영화가 유명한 나라로만 알고 있었는데 와보니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를 보고 미소지어 준 한국인들이 가장 아름다웠어요."

지난 6일 벌어진 MBC 초청 한-이라크 친선 축구 경기가 전쟁의 상처로 고통받는 이라크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이라크에 파병될 자이툰 부대의 열렬한 응원과 격려 속에 펼쳐진 이날 경기는 이라크 전역에 생중계됐다. [중략] 이들은 "한국은 천국"이라며 엄지를 추켜세우며 연신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다시 전쟁의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의 아픔과 그늘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 중앙일보 4/8

이 기사를 읽고 나는, 몇 년전 국제기구 관련 업무차 만났던 한 스리랑카의 교육관리를 떠올렸다. 유창한 영어에 화려한 언변, 낯선 문화에 관한 넘치는 호기심과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을 지닌 구리빛 얼굴을 한 그 중년의 사내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를 포함한 외국인 일행과 일주일 가까이 많은 곳을 다니면서 연수 프로그램을 받고 한국의 풍물도 관광하며 서로에 관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게 되었는데, 그가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었을 때 남긴 말이 뇌리에 새겨졌다. 그는, 자신에게는 지난 일주일 간의 한국 체류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르고, 한국인의 환대는 황홀했으며, 문화 체험과 교육 프로그램 등은 대단히 훌륭했다고 말한 뒤,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신의 심정은 매우 어둡다고 토로하는 것이었다. 이유인 즉슨, 관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나라에서 소수 인종에 속하기 때문에 언제 갑자기 살해를 당할지도 알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불안한 정황의 나라에서 살던 그에게 한국은 마치 "천국"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우리 국민들 중의 많은 이들이 - 나 포함 - 큰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이 나라, 이 사회가 이렇듯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특히 '선진국'이라는 데서 유학생활 하고 돌아온 자의 눈에는 더욱 후진스러워 보이기만 하는 우리 나라의 여러 모습들에서 어떤 이는 "천국"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참 희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나라에 대한 저개발국가 출신 인물의 그러한 장미빛 찬사가 예외적인 일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특히 2004년 현재 전세계 인구의 1/5인 약 12억명이 '절망적 빈곤'의 수준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전 인류의 1/3이 하루에 1달러로 연명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 얼마 전 책을 낸 탤런트 김혜자씨의 증언을 들어보면 지구의 나머지 부분이 어떠한 빈곤과 폭력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기아와 내란에 찌든 소말리아인이나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라크인들, 이런 사람들에게 한국이 "천국"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꼭 터무니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결국 어떤 눈으로 보는가에 따라 내 앞의 현실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또 종교적으로도 여러 모로 성에 안 차고 마음에 안드는 행태들이 지속되고 있는 이 땅이지만, 내가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을 적엔 그러한 이 땅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당시엔 주말의 즐거운 엔터테인먼트가 한국 텔레비전 프로가 녹화된 비디오 시청이었는데, 이제 귀국해 살면서는 조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는 눈길도 안주고 미국 영화나 기웃거리고 있고...

그래도 내가 이 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내가 잘 안다. 그래서 매일매일 이 땅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한때, 내가 도대체 왜 지금의 가족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일지 그 인연의 필연성 같은 건 아무 데도 없을 거라고, 즉 나와 내 가족은 이 우주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라고 믿고 살았던 적이 있었으나, 우연으로 알았던 그 인연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필연의 소치인지 깨닫고 나서 가족을 더욱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되었던 것처럼, 나도 이 땅에 그냥 우연히 태어난 것은 아니고, 따라서 이 땅에서 해야할 소중한 일들이 있음을 믿는다. 내게 주어지고, 내 손에 쥐어진 이런 인연들이 겉보기에 아무리 그저그렇고 시시해도, 어리석은 내 눈에는 아직 보이지 않는 소중한 보석을 품고 있음을 믿는다.

이라크에서 온 손님들은 자국의 참상에 비추어 코리아가 천국이라는 즉흥적 감상을 우리에게 전해준 것이었으리라. 어쨌든 예수께선 이곳이 천국임을 이미 선포하시지 않았던가. 예수님의 그 말씀을 믿기가 힘든 건 포연에 휩싸인 이라크 사람들이나,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한국의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인가보다.

그래도, 예수님을 싸부로 모시겠다며 그 싸부님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건 어불성설; 고로 나라도 이곳이 천국임을 믿고 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