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려보내기 (2004/5/29)
 

1. Dream

간밤 꿈에 내가 신과 합일이 되기 위하여 - 또는 붓다가 되기 위하여 - 온 몸과 마음이 엄청난 기운으로 변화하며, 나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이 눈부신 황금빛으로 빛나는 순간을 겪었다. 그때 나는 이 생의 무언가를 차마 놓지 못하여 미세한 안타까움을 느꼈으며, 바로 그 때문이었는지 황금빛 변신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한 채 중단되었음을 알아챘고, 그리고 꿈은 도중에 끝나버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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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Movies

최근들어 본 두 편의 한국 영화는 꽤 수작이었다. '올드 보이'와 '사마리아'였다. 이미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걸작을 통하여 압도적인 재능을 선보인 바 있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 그리고 집요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파고 들어가는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 그들의 작품과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그들의 표현을 접할 때마다 나는 영화감독인 그들이 바로 구도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공교롭게도 이 두 작품 다 '딸'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있다. 딸이란 어떤 존재인가? 특히 아빠에게... 딸은 보호되어야 할 대상이다. 누구로부터? 무시무시한 늑대로부터. 예로부터 (특히 서양에서) 무서운 늑대는 순결한 딸들을 잡아먹으려 컴컴한 숲속에서 눈을 번득이고 있다. 아빠는, 실은 자신도 과거에는 그 늑대 협회의 정식 회원이었었고, 비록 현재 활동을 (잠정적으로..) 접고는 있어도 자신의 협회 멤버쉽이 완전히 만료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그런 늑대로부터 자신의 순결한 딸을 보호하기 위해 온갖 전략과 전술들을 정비해둔다. 그러나 그런 전략과 전술들이 완벽하게 효과적일 것인지는 상당히 의심스럽다. 아마도 이러한 불안 심리는 많은 딸을 둔 아빠들에게 공히 내재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딸을 둔 아빠들에게 '올드 보이'와 '사마리아'는 악몽 그 자체이다. 후자에서는 딸이 수많은 늑대들에게 스스로를 먹이로 내어주는 것을 아빠가 직접 목격하고, 전자에서는 한술 더 떠서, 우여곡절 끝에 늑대 협회 회원으로 복귀한 아빠가 어쩌다가 잡아먹게 된 어린 양이 알고보니 실은 옛날에 잃어버렸던 친딸이었다. 가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최악의 악몽들이다. 딸을 둔 아빠들에게는.

순결한 딸을 보호하고자 하는 아빠의 허망한 사랑, 또는 보호 욕망을 바라본다. 딸을 보호한다 함은 상처받고 해를 입기 쉬운 연약한 대상을 고이 보존시키겠다는 열망이다. 그 열망의 끝간 데 없음은 지독하게도 불합리하다: 도대체 상처받음과 해 입음으로부터 그 누구를 영원히 지킬 수가 있겠는가? 성장은 곧 상처받음과 해 입음을 수반하고(실은 '상처'도 '해'도 없는 것이나), 그것을 뚫고 잃어설 때에만 딸은 자라서 어른이 될 것이다. 물론, 현상계에서의 신중함을 존중하는 자세로, 나는 나의 딸들이 자신을 스스로 돌볼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필요한 보호와 보살핌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아빠의 보호는 반드시 어느 선에서 끝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을 보호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칠 듯이 발악을 하는 '올드 보이'의 아빠의 모습을 비난할 수 있는 딸을 둔 아빠는 없지 않을까 짐작한다.

자식 뒷바라지 하는데 바쳐진 한 평생의 슬픔. 어쩔 수 없이 자라나고, 변화하여, 결국 떠나갈 수밖에 없는 그 무언가를 보호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에 낭비되어버린 인생이란... 이는 비단 딸을 둔 아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3. Money.

주변에 백세가 훌쩍 넘은 할아버지가 고급 양로원에 계시는데, 옆 방의 팔십 먹은 할머니가 평생 모은 재산을 주체하지 못하여 맨날 그 돈 관리하느라 바쁜 모습을 보시고는, 이제 그만 돈에서 손 떼고 쉬라고 조언하셨다 한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며칠 후 저 세상으로 떠나셨더라는 것이다.

한 사십대의 엘리트 증권맨은, 남은 여생 걱정 없을만큼 부를 축적해놓았건만, 아직 젊은 나이에 삶의 회의에 빠져 자살 충동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움켜쥐고 보존하는 일에 평생을 낭비한다.


4. Belief

동네의 큰 교회에서 지난 번엔 이쑤시개를 판촉물로 가가호호 돌리더니, 이번에는 두꺼운 볼펜을 돌리는 것이었다. 불경기의 업소간의 치열한 경쟁은 서울 도심 룸싸롱들 사이에도 벌어지고 있다. 집 앞에서 자전거를 손보고 있는 나에게 교회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찌라시와 판촉물을 받으라 했다. 식후에는 꼭 이쑤시개를 사용하는 못된 습성 때문에 지난 번 순간적으로 혹하여 받아놓은 이쑤시개가 여전히 찬장에 두 통 남아있는 것을 매일 보게 된 것을 후회하며, 이번에는 그 둘을 다 거절하였다. 아주머니는 쉽게 단념하지 않았다. 나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찌라시는 관 두고, 볼펜만이라도 받으라는 것이었다. 순간 내심 당황했다. '볼펜만이라구요? ... 이거 받아도 되는 거 아냐? ...' 그러나 다행히, 이도 거절하였다. 집요한 아주머니의 계속되는 공세를 결국 단호하게 막아냈다. "제발, 사양하겠습니다." 한 마디 더 해주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제가 볼펜 받는 걸 예수님은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어떤 믿음 체계, 관념(idea), 또는 '벽'을 어떤 이들은 평생을 부여안고 산다. 그것을 지키느라 평생을 낭비한다 -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제외하고.


5. Comparison

가난한 나는 지금 가진 재산이 얼마밖에 안되고 저 미운 부자는 수십 억을 굴리고 사는데 정부는 왜 저런 부자들 지갑은 안 건드리고 나같은 서민만 박박 긁는 것인가, 규탄하라! .... 부자가 부자가 된 소이연(所以然)에는 쉽게 재단할 수 없는 수많은 요인들이 있으리라 본다. 개인의 성실과 재물운용 능력 뿐만이 아니라 '계급 구조' 측면에 속하는 상속, 그리고 좌파에서 제기하는 매판독점자본세력과의 결탁까지... 헌데 그게 다일까? 개인의 운명이나 팔자 - 전적으로 수동적인 것은 아닌 - 같은 건 낄 자리가 없을까? 합리주의와 사회과학의 지당하게 철저한 외면에도 불구하고,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운명이란 요소도 있을 것이라 본다. 저 부자가 저렇게 부자로 이번 생에서 살고 있는 이유에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요소들 플러스 운명이 있다고 본다는 말씀이다. 다 그럴만 해서 그러하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천운(天運)에 속하는 요소를 도외시하고 감각적으로 주어진 재단의 도구들만 이용하여 부자를 평가, 판단, 심판하고자 하는 정열을 심히 경계한다. 부도덕한 부의 축적에 대한 비판은 반드시 필요하나, 점진적 개혁이라는 한계는 존재한다; 그 한계가 없다면 결국에는 사회주의 혁명 말고는 별 옵션이 없는데, 혁명은 가장 비효율적이고도 피에 굶주린 사회 변화 방법이어서 나는 반대한다. 과연, 주어진 자신의 모습을 불행으로 여기지 말고 '분수에 맞게' 살라는 말이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의식을 약화시키려는 자본가 세력의 음모일 뿐일까? 개인의 행복과 구원은 결국 내면에서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삶 속에서 끝없이 타인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평생을 낭비한다.


6. Jazz

어느 휴일 저녁 무렵, 혼자 자전거를 타고 가까운 서울대공원에 갔다. 널찍한 광장 한 켠으로부터 음악의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몇 명의 서양 청년들이 즉석 재즈 연주를 들려주며 모자에 기부금을 받고 있었다. 그들 앞에서 감상하고 있는 무리의 틈에 끼여서, 흘러나오는 재즈 선율에 몸을 내맡기고 서있었다. 서늘한 저녁 바람, 여유로운 선율, 기분 좋은 청중, 그리고 흥이 돋은 연주자들... 두어 곡 정도 듣고 가려다가, 허름한 그들의 옷차림과 성의 어린 연주 때문에 그들 모자에 한 푼 보태주고 싶어졌다. 그러나 아까 집 나설 때 돈을 한 푼도 가져오지 않았다.

헌데, 마침 허리에 차고온 주머니에 비상금 천원이 들어 있음을 용케도 기억해냈다; 언젠가, 집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전거 바퀴가 펑크가 났는데 수중에 땡전 한 푼 없던 탓에 집까지 걸어오느라 반나절은 걸렸던 적이 있었다. 그때 다시 펑크가 날 재수 없는 경우를 대비해서 버스 삯으로 쓰려고 구겨넣어 뒀던 천원 짜리 지폐 한 장이 있었던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비상금 천원을 이방인 연주자들의 모자에 집어넣어 주고는 발길을 돌렸다 - 자전거 바퀴는 절대로 펑크가 나지 않을 것일까?

한 연주자가 미소 지으며 살짝 윙크했다. 나도 미소를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재즈는 순간에 묻어있는 일상의 헛된 자취들을 잘 흘려보내주는 것 같다.

Let it go, let it go, let it go.


7. Dream Again

다시금 꿈속의 황금빛 변신에 도전할 수 있을까?



* 어떤 '권위자'가 이렇게 두서없는 글들을 한데 모아놓고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며 일갈을 하였다면, 추종자들은 아마도 이 글들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정교한 전개와 미묘한 연계성 등을 찾아보려 애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물론 저 따위의 글을 이해하려 그런 식의 수고를 바칠 어리석은 이는 없겠으나, 재즈의 선율을 떠올리며 흘려썼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