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망각 (2004/9/27)
 

옛 설화 중에는 모험의 길을 떠난 주인공이 선행을 베푼 대가로 빨간 주머니와 파란 주머니 등을 수중에 넣게 되고, 곤경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중의 하나를 풀어보고는 그 상황을 헤쳐나갈 지혜로운 방도를 찾게 된다는 이야기들이 종종 등장한다. 이런 설정을 보기에 따라서는, 선행을 베풀어서(또는 수행에 정진하여) 지혜의 주머니를 습득했다는 사실뿐이 아니라, 적확한 타이밍에 그 주머니를 풀어볼 생각을 했고, 따라서 지혜를 실제로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 스토리의 키포인트가 '되어야 하지(ought to be)'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혜의 현실적 유용성은 그 지혜의 순도(純度)나 고결함 보다는 그것을 실제로 곤경에 처했을 때 꺼내서 활용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순수하고 드높은 지혜 보따리를 아무리 많이 내면에 꿰차고 살면 뭐하나? 진짜로 지혜가 필요한 순간엔 하나도 끄집어내서 써먹지를 못한다면.

일주일에 한 번씩 핀드혼(Findhorn)에서 보내주는 신의 메시지다:

스트레스와 피로를 야기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건 바로 과거 속에서 살고 있거나 미래를 꿰뚫어보려 하는 것, 그러면서 네 딴엔 스스로 볼 수 있다고 상상하는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지독한 어리석음인가! 이런 시간의 낭비가 어디 있겠는가! 너희들중 누구에게든지 내가 요청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지금 속에서, 바로 이 순간 속에서 온전히 삶으로써 너의 삶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지금이 되고, 따라서 어제나 심지어는 오늘, 또는 내일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고 당장의 이 순간만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너는 다음 번 들이마실 숨이 어디로부터 올지 염려할 필요는 없다. 숨쉬고 있는 매 순간 속에서 이를 받아들이고, 그에 대하여 감사하여라. 이 순간 속에서 온전히 사는 것은 내가 주는 가장 커다란 선물이기도 하다. 이 순간이 마치 네 삶속의 유일한 순간인 것처럼 살거라, 그리하여서 네 삶을 한껏 즐겨라.

지당하신 말씀. 존재하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뿐이니(now_here) 존재하지 않는 과거나 미래의 노예가 되지 말고 오직 이 순간만을 완전히 꽉 채워서 살라. 오래 전에 이에 대한 영감을 받았고, 이성적으로 깨달은지 한참 되었으며, 정신적, 심리적으로 내 신조로써 받아들이고 산지도 꽤 된 지혜의 말씀이다. 이 지혜를 받아들이고 삶으로써 나는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들도 여럿 할 수 있었으며, 내 삶을 평범한 평화로 채우고 내 주위에 그 평화를 퍼뜨리는 심지어는 거룩한 시도조차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만큼이나 이 지혜를 열심히 받아들이고 활용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일조차 가능하다는 것을 이제사 깨닫게 되었다. 이런 것을 어리석음이라 해야 할까? '섀대가리'라고나 해야할까? 내 기분은 마치, 자신이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해서 수학에 좀 조예가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산수 문제도 풀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심경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언제나 지혜가 진짜 내것이 될 것인가? 물론 지혜를 내것으로 만들려는 그 마음조차 없어질 때이겠지. 지혜를 망각함으로써 내가 얻은 교훈은 따로 있다: 죽을 때까지 잘난 척 말라는 것. 미끄러질 때마다 울고 다시 일어서는 간디 스승을 본받아, 언제든지 미끄러질 수 있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라서 언제나 겸허하게 살라는 것 - 이 또한 새삼스러운 깨달음도 아니지만.

수행한다는 주제에, 오직 제 마음, 제 몸뚱아리만 생각하고, '내 이웃'은커녕,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주는 사람들조차도 편하게 해주지 못하는 한심한 '수행자'를 발견한 것 또한 큰 소득이라면 소득이겠다. 이런 이기적인 나 자신이 실은, 나를 사랑해주는 이들의 기도 덕으로 살고 있다는 것마저 깨닫게 된다. 전가의 보도인양 써먹는 '참스승'으로서의 임무란 것도, 실은 그것을 믿고 기도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수행해낼 능력이 내 안에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참으로 지독하게 사랑과 은총을 받고만 살아온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님께서 너무도 많은 것을 주셔서 그동안 오만하기가 이를데 없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해본다. 벌떡 일어나지 못함에 오히려 감사한다. 낮은 데로 임하시는 당신을 보지 못한 채, 드높고 고귀한 곳에서만 노닐고자 했던 나 자신을 심히 부끄러이 여기며, 이 아래의 어두컴컴한 이곳에 이렇게 머물러 있게 해주심에 주님께 감사드린다. 주님께선 정말 굉장하시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은총만을 주실 수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