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스런 공부 (2004/8/7)
 

요즘 깊은 공부중. 대체 깊지 않은 공부가 어디 있겠는가만은, 요즘의 내 공부는 '깊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자아의 내면 세계를 탐색해보는 해외 영성 단체의 프로그램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는 먼저 이 프로그램을 내가 이해하여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그것을 나 자신에게 적용시켜서 실제로 어떻게 내면 탐색을 할 수 있는지 실험해보는 과정까지도 포함한다. 전자도 만만치 않지만, 후자는 어렵다. 이런 '공부'를 몇 시간씩 하고 나면 저녁 무렵엔 기가 소진하여 꼼짝도 못하겠다. 여기에다 앞으로 교육과 관련하여 내가 쓰고 싶은 책 준비하랴, 장차 모종의 사업을 벌일 사전준비 연구하랴 하다보면 일주일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별 수 없이 (거의) 모든 돈벌이를 끊어버렸고, 이 싸이트 업데이트도 제대로 못하고, 아이들과 놀아주는 시간도 많이 줄였다.

물론 벌어놓은 것으로 얼마간은 충분히 버틸 수 있으리란 계산이 있어 수입이 되는 일들을 끊어버린 것이긴 하지만, 때때로 내 공부에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별로 생산성이 제고되지 않는 것만 같은 순간에는 스스로의 시도에 잠시나마 회의가 일기도 한다: 처자식 줄줄 딸린 '가장'이 돈벌이도 안하고 뭐하고 있는 건가...

허나 그런 자괴감은 순간적일 뿐, 곧 공부에 다시 몰입한다. 그리고 내가 가진 너무도 많은 은총들에 다시 한 번 감사한다. 무더위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 나오는 쾌적한 나만의 작업 공간, 내 마음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자유, 당분간 돈벌이 하나도 안해도 식솔 먹여살릴 수 있을만큼 - 보잘 것 없지만 - 남아있는 돈, 나를 믿고 사랑하는 가족과 늘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여러 친지들... 누가 이보다 더 많이 이 세상에서 갖고자 바랄 것인가 - 진정 탐욕스런 이 말고는.

폭염 속에 외국서 온 사람들을 안내하여 서울 나들이 갈 일이 몇 번 있었다. 건축현장에는 작렬하는 태양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발을 겨우 한 걸음씩 떼면서 자재를 나르는 늙수그레한 일꾼들이 있었다. 그들의 고된 삶. 나의 쾌적한 연구실. 그것으로도 만족 못하여 뭔가를 더 이뤄보겠다고 욕심부리고 있는 나... 남대문 시장에는 잘 팔리지도 않는 물건들 좌판에 늘어놓고 호객하는 상인들을 본다. 끊임없이 행인들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시선을 던지며 하나라도 더 팔아보려고 그 신성한 일에 몰두하고 있는 그들. 인사동에서 기념품을 파는 고교 동창생도 외국 손님들 끌어보려 외국어로 호객하면서도 모처럼 들른 나와 나의 일행을 위해 이것저것 값을 깎아서 건네줬다. 다음에 맥주나 한 잔 하자 인사말 건네고 그의 삶의 현장을 벗어났지만, 그 '다음'은 조만간 도래하지는 않을 듯 하다. 왜냐하면, 나는 '공부'하느라 너무 바쁘기 때문에.

노동자와 상인들의 절실한 생활, 그것을 지금의 나에게선 찾아볼 수 없다. 돈 생기면 여행다니느라, 맛있는 것 사멕이느라 다 써버리고는, 또 속 편하게 다음 번 벌이를 기다리며 사는 나. 나는 얼마나 드높은 팔자로 태어났기에 생활 그 자체를 위하여 절실한 매일을 보내고 있는 저들의 위에서 이렇게 유유자적하고 있는 걸까? 나의 심오하고 중대한 지상에서의 '소명'이 이런 나의 모든 사치를 정당화해줄 것인가? 내가 진짜로 그 소명의 실현에 있어서 그럴 듯한 진전을 일구어내고나 있는가? 이런 예외적인 고고함의 사치를 정당화해줄만큼?

비록 그동안 내가 열심히 공부해오기는 했지만, 서민들의 삶의 현장에서 유리된 이러한 안락한 삶으로 인하여 마치 내가 카르마에 의하여 이러한 선택된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다는 착각이 피어오르기도 했음을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이 때문에 어떤 성자들은 서민들 품속으로 양식을 구걸하러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공부 하나라도 잘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