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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풍이
차디찬 겨울에는 새싹이 움트는 봄날에 대한 희망이 있지만, 다가올
겨울을 기다리고 있는 가을 날에는 절망의 골짜기 아래로 내려가
허무의 늪에 발을 담그는 것이 오히려 용이하다. 가을의 오후, 청명한
하늘 아래에 뿌연 황금빛 햇살이 비스듬히 던져질 때 영원의 고향이
그리워지고, 어차피 가게 될 그곳에 아직도 가지 못하여 이렇게 아둥바둥
타향에서 버티고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언제나 돌아갈 것인가, 영원의 고향으로...
현상계를 뛰어넘어
본질적 영계를 넘나드는 각자(覺者)들은 존재의 궁극적 허무와 고독을
깨닫고 우주의 법리를 꿰뚫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현상계 자체가 제공하는
인간 삶의 모든 것들이 허무함을 느끼게 된 범부(凡夫)는 깨달음이
아닌 자기부정을 체험하게 된다. 인생무상과 삶에 대한 허무감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떨치고 사라지고픈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을 이십대에
체험한 바 있지만, 사십이 넘어 느끼게 되는 허무감은 감상의 사치와
감정적 유희를 허용할만 한 현실적 여유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지 몰라도, 간혹 홀로 있을 때 불현듯 나를 엄습해오곤
한다.
그동안 자전거는 부숴지고 몸도 불편한 탓으로 운동을
못하고 지내다가 어제 모처럼 짬을 내서 관악산을 넘었다. 비스듬히
비쳐오는 햇살을 애써 회피하며 몇 시간 조용히 산을 넘다보니, 그렇게
좋아하던 등산 그 자체가 전혀 재미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하고 싶은 게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저 어디에 퍼질러 앉아 술 마시고
담배나 피우면 편할 것 같았다. 아, 결국엔 모든 것이 이렇게 허망한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지? 아직 못다 한 할 일들이 남아
있는데 벌써 이렇게 허무함을 느끼다니.
산을 내려오며 가난한
집들이 많은 동네 어귀를 지나며, 그날의 생계를 위해 땀흘려 일하는
이들을 보았다. 아, 내가 등따습고 배불러 이러나보다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난 닷새동안 거의 쉴틈없이 공부하고 일만 해오지
않았는가. 그도 아닌 것 같다. 그런 생각은 지나친 자기비하인 것 같다.
내가 허망함을 느끼게 된 것은, 오랫동안 믿어왔던 가정의 소중함이라는
것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맛본 것과 남녀간의 사랑의 허무함을
새삼 느끼게 된 것과 관련 되어있다. 뭘 이루어보겠다고 그리도
아둥바둥 가정을 위해 노력해왔으며, 사랑을 위해 내 존재를 바쳤었던가?
이런 허무감에 빠진 주제에 무슨 교육자의 길을 걷겠다고 요망을
떨어왔는가?
헛되고 헛되다.
며칠 전만 해도, 거대한
현실의 힘 앞에 무릎 꿇지 말고, 한 번에 한 사람씩이라도 도와주는
교육자의 자세에 관하여 나의 학생들에게 외쳐댔었다. 나는
내가 교육자로서 그렇게 살아왔다고 믿었다. 지금, 거대한
허무감이 그 모든 진심과 열정과 사랑을 무효화시키려 하고 있다. 과거에도
현상계가 지극히 허무함을 느끼며 기계와 같은 삶을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텅 비어있음이 허무가 아니고 실은 사랑이 스며들 자리라는
것을 깨우쳐 준 것이 나의 신이시었다. 나는 오늘 아침도 나의 주님께
무릎 꿇고 기도드렸건만, 여전히 이 허무감은 그대로 자리잡고 내 안에 앉아있다.
신을 알면서도 이러고 있는 꼬락서니를 가리켜 신성모독(blasphemy)이라고
부른다. 부끄럽지도, 고통스럽지도 않다. 다 허망할 뿐이다.
나의
주님이시여...
이런 저조차도 용서해주실 것임을 믿고 엄청나게 투정을
부려보고 있습니다. 당신의 끝없는 자애로우심이 저를 이렇게 버릇없게
만드신 것은 아닌가요?
아무래도 하나님께서는 나같은 한심한 종을
너무도 사랑하시는가 보다. 허무 속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나에게 브루더호프
뉴스레터를 통해서 바로 메시지를 전해주신다. 나의 허무감을 합리화해줄만 한
토마스
머튼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우리는
신앙이 확신과 평화의 문제가 되기 이전에 의심과 투쟁의 문제라는 것을
너무도 자주 잊어버립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확고하게 믿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들을 의심하고 거부해야 하며, 당신이 믿기 시작한 후에는
당신의 신앙 그 자체가 시험받고 정화되어야만 합니다. 기독교는 예전에
만들어진 결론들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신비 속에서
불타오르는 신의 임재에 비추어질 때 그 헛됨이 드러나기 마련이고,
그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도피할 곳을 찾습니다. 믿음이 도피처로
삼는 그 안락한 사회적 겉치장과 안전한 확신 안에서는 정화가
더 이상 내면의 투쟁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내는 제스처일 뿐이지요.
주님,
허무도 제 수행의 한 단계일 것으로 억지로 믿겠사오니 이번 한 번도
더 용서해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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