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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에 연일 계속된 음주로부터 직접적으로 피해를 받은 것은 느낄
수 없었는데, 간밤에는 한밤중에 갑자기 아랫배가 아파와 잠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오고 나서부터, 작년에 진찰을 한 번 받은
적이 있었던 부분에서 통증이 느껴왔다. 당시의 진단과 검사 결과는
이상무였지만, 워낙 사십대의 암 발병율이 높은 나라에서 살다보니 괜히
겁먹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곳이 또 아파오는 것이다. 또 겁이
조금 났다: 정밀검사를 받았어야 했던 건 아닌가... 잠자리에 누워
계속되는 통증 그 자체만을 느끼고 있다가 퍼뜩 '기억'해냈다: 몸뚱아리가
'참나'가 아니지! 따스하고 안락한 잠자리의 평온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내 속으로 조금씩 들어가서 여전히 잠자고 있던 참나를 깨워보려
했다.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 모든 게 축복이고 선물이다. 아,
그랬었지, 잠깐 깜빡했구만. 몸에 가해져 오는 통증을 축복으로 받아들인다.
뭐, 참을만 하니까. 누워서 눈을 감고 중얼거린다: 주님, 감사합니다,
아픔이 있어야 안락의 귀함을 알지요. 한참 뒤, 통증은 어느새
사그라들며 몸은 다시금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간밤에
잠을 조금 설치긴 했지만 몸과 마음이 상쾌하다. 혹시 그 통증이 몸의
심각한 고장의 신호였다면 어떻게 하지? 그것도 다 그럴만 해서 그런
거겠지, 일단 지금은 만사 OK.
오전에 집안 청소를 했다. 청소
수행을 작년에 열심히 지속한 덕에 이제는 진짜로 기쁜 마음으로 청소를
할 수 있다. 예전과 비교해보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전에는, 왜 신은 우주에 이렇게도 많은 먼지를 만드신 걸까
하는 불평 섞인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먼지에 감사한다. 다
있을만 해서 있는 것일 게다. 먼지 없는 세상이란 변화 없는 세상 아닐까?
미세한 입자 수준에서부터 침식과 이탈이 일어나야 세상의 모든 것들이
변화하는 것 아닐까? 또 그보다는, 먼지가 더럽혀주지 않으면 청결함이란
기분 좋은 상태를 어떻게 우리가 알 수가 있겠나. 깨끗함이 있기 위해선
반드시 더러움이 존재해야 한다. 청소를 마치고 몸을 씻었다. 몸의 때에
감사한다. 그것을 없애는 즐거움을 나에게 선사하므로; 그것을 제거하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고 볼 것이 아니라, 이왕이면 좋게 보자.
아픔을
겪어보지 않고서는 건강한 몸의 평온을 알 수 없고, 더러움이 존재하지
않으면 깨끗함도 구할 수 없다. 이러한 대조에 기초한 '감사의 앎'은
다양한 스펙트럼 위에 상존하고 있을 터이며, 어쩌면 하나의 연속선
상에 표현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연속선의 극단의 표현이란 아마,
선(善)을 비추어 주는 악에 대한 '감사의 앎'이 될 것이다. 하느님,
우리가 선을 알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악을 주심에 또한 감사합니다.
욕실의
수납장 꼭대기와 천장 사이에는 비좁은 공간이 있다. 거기에
두루마리 휴지 같은 걸 넣어두면 넓지 않은 욕실 공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텐데도, 사용하지 않고 놓아두는 이유가 따로 있다.
그 공간에 먼지가 잔뜩 쌓여 있고, 게으른 내 몸이 그 먼지를 닦아내기를
귀챦아 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 먼지 쌓인 어두운 공간의 더러움이
두렵기 때문이다. 한 번 맘 잡고 그 먼지만 제거해버리면 그곳이 밝고
유용한 공간이 될 텐데도. 이 또한 사람 마음 속의 이치와 같다.
내 마음 속에 건드리지 않고 오랫동안 놓아두었기 때문에 먼지 쌓이고
더러워진 부분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닦는 과정에서 자신이 더러워질
것이 두려워 그 부분을 그대로 방치해두고만 있다. 지금 내 안에는 그런
어두운 부분이 있나? 그것은 무엇인가? 너무 오래 방치해둔 것은 아닌가?
열심히
청소해서 깨끗해진 거실에 한낮의 햇살이 눈부시게 뚫고 들어오는데,
그 햇살 속에서 엊그제 떡국을 먹고 다섯 살이 된 둘째가 제 부모를
바라보며 재롱을 피운다. "난 아가 캥거루야! 깡총깡총" 두
손과 두 발을 모으고 통통 뛰며 내 눈을 바라본다. 아이의 재롱이라는
선물을 주신 신께 아주 아주 많이 감사한다. 난 분명히 전생에 좋은
일을 뭔가 했다. 그렇기에 이런 선물을 받고 있지. 사십이 넘도록 총각이라
예뻐할 아이도 없는 친구들을 연민해본다.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고, 나는 간만에 집에 남아서 이런저런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집안 여기저기에서 가재도구들이 뒹굴며 혼잡한 형국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리정돈의 대가(大家)인 나라는
인간과 어쩌다가 살게 된 정리정돈 무신경주의자인 내 아내의
팔자란... 과거에는 꽤나 서로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던 우리 부부의
그 차이점. 과거에는 내 눈에는 엉클어진 - 그러나 아내의 눈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 집안 모습을 볼 때마다 한숨이 푹푹 나왔거나, 심지어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는 화까지 내곤 했었는데... 지금은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흘러나온다: 그 성격에 애까지 둘씩이나 키우고 살림하려니
이럴 수밖에 없겠지. 아내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나는 분명히 몇
년전보다는 나은 인간이다.
저녁 무렵, 어둑어둑한 연구실에서
책을 읽다 새뮤얼 밀러라는 이의 다음과 같은 글에 주목한다: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혁의 크기가 거대하여서,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의 크기에 맞도록 해야 한다." 개인의
내적인 변화와 세계와의 관계... 이런 것에 관한 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우리 나라의 청소년들이 스무 살이 되도록 자신의 진정한 내적인
변혁을 경험하지 못하고, 과거 칠, 팔십년 대에는 그들이 대학생이
되어 자신이 세상의 필요에 대응할 수 있다는 그 순수한 행동 가능성
- 생전 처음 깨달은 - 에 온 마음을 사로잡혀 그렇게도 쉽게 민주의
투사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자라나는 아이들로
하여금 세상과 내가 하나임을 알고 느낄 수 없도록 만드는
우리 사회는 마땅히 변혁되어야 한다. 변혁을 위하여 우리는, 아니, 나는
밖이 아니라 안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원천으로. 내가 안으로
파고 들어가고, 다른 이들도 그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현실적으로
고안해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 고안 과정의 어디쯤에서 기능하고
있는 부속물일까? 어쨌거나 공부를 계속하자.
늦은 밤에는 소설책을
읽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돈벌이는 못했지만 평균보다 조금 더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오늘 안에 하고자 했던 것들을 전부 할 수 있었으니까. 신년
초기에는 대체로 큰 일도 없고 주변도 조용한 탓인지 평화롭고 보람있는 나날을
보낼 수 있다. 중요한 건, 줄곳 의식하고 사는 것이다, 나의 참 자아와
함께 있을 때 평화가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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