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

완벽주의 (2004/5/4)

나는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완벽주의적 성향 -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증상' - 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사항 중의 하나가 내 식솔들이다. 첫 애를 미국에서 출산하게 되었을 때에 나는 심지어는 아내가 진통을 시작했을 경우에 대학병원의 분만실에 가장 빨리 도착하기 위한 주차 공간까지 미리 계산해두고 있었다. 이런 내가, 함께 사는 사람을 정신적으로 질식시키는 경향이 있음을 서른 살 쯤이나 되어서야 비로소 깨우쳤다. 아마도 나는 호텔 지배인을 하면 최고의 재능을 발휘할 것 같다; 모든 분야에 꼼꼼히 신경을 쓰고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불철주야 눈을 부릅뜨고 있을 테니. 이런 내가 첫 애를 출산할 때 예상치 못한 난산에 이틀을 뜬 눈으로 밤을 새고 사흘을 처자식 돌보느라 함께 입원해 있으면서, 자신의 완벽주의 성향의 헛됨을 처절히 깨우쳤었다.

그렇게 나은 아이가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니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고 하겠다. 그간 나에게는 삶을 신과 함께 하게 되었다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신의 뜻에 나를 종으로서 맡기는 자세를 차근차근 배워나가게 되었지만, 그래도 타고난 나의 성향이 말끔히 사라져 버리지는 않는 것 같다 - 그것은 일종의 못된 습관이자 숨겨진 축복이기도 한데... 나의 완벽주의 성향은 평소에 조금 수그러져 있다가도, 예를 들어 처자식을 데리고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경우에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 식구가 여행을 떠나게 되면 우선, 짐이 엄청나게 많다. 예상 가능한 모든 상황에 대비한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을 갖추고 가기 때문이다. 나의 아이들은 눈이 오나 비가오나, 민박집에서든 콘도에서든 항상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책, 장난감, 노트북PC에 담긴 음악과 게임, 애니메이션 CD, 그림 그리기 도구 등등... (단 그 '즐거운 시간'이란 애비에 의하여 규정된 즐거움만을 내포하고 있지만.)

나는 운전도 완벽주의적으로 한다. 사실, 십여 년 이상 무사고 운행중이기도 한데, 나의 운전은 결코 얌전하지 않은 편이다 - 내 옆 좌석에 처음 타 본 사람들이 대개 온 몸의 근육이 경직된다는 호소를 해오는 걸 보면. 비록 타고난 성질 때문에 빠르게 달리긴 해도, 최선을 다해 주의를 집중해서 운전한다. 특히 사랑하는 식솔들을 차에 태우고, 여행용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을 잔뜩 싣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 한 편으로는 온 가족의 안전을 생각하여 적절한 속력을 유지해야한다는 지침과, 또 한 편으로는 차멀미가 심한 둘째 때문에 가능하면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는 상반된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나는 '특수 운전 모드'에 돌입하게 된다. 평소에도 조심해서 운전하지만, 이 모드에서는 마치 내 차를 둘러싸고 약 열 개의 고감도 센서가 작동하고 있는 가운데, 나의 두뇌는 그 센서들이 수집하는 주변 도로의 온갖 상황 정보를 끊임없이 수집, 판단, 처리하는데 몰두하며 고속으로 차를 주행하고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특수 모드' 하에서 나의 차는 시속 120km~150km 정도의 속력으로 질주한다. 이런 작업에는 당연히 신경이 곤두서게 되는 법. 비록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것은 관용되지만, 만약에 두 녀석이 큰 소리를 내고 싸우기라도 하면 냅다 나의 고함 소리가 터진다. 운전하는 폭군 애비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특수 운전 모드 덕분에 우리 식구는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에 편안하게 도착한다. 물론 목적지에 대해서는 사전에 인터넷을 통하여 풍부한 조사가 되어 있으며, 엄선된 숙소가 예약되어 있다. 아내의 체력, 아이들의 기호, 둘째의 낮잠 자는 시간 등등을 감안하여 그날 그날의 여행 코스가 수립되어 있다. 그러나, 나의 완벽주의가 경직되어 있지는 않아서, 돌발성과 의외성을 좇는 경향이 있는 아내의 요구가 여행 코스중에 수시로 반영된다. 도로를 질주하다 갑자기 저 앞에 나타난 흥미로운 지명을 따라 운전대를 돌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다만, 그럴 경우 나의 기존의 계획이 빠른 시간 안에 조정되는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잠시 동안 나는 계획 재조정의 삼매지경에 빠져있게 된다. 결혼 생활 초반, 여행을 떠나거나 귀국하기 전에 온 집안을 깔끔하게 청소해놓고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해두는 나에게 아내는 '숨이 막힌다'고 불평했고, 그 불평은 나에겐 오랫동안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었더랬는데, 지금은 나의 주도적 완벽주의에 아내의 무계획적 돌발성향이 사이좋게 융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나의 철저한 준비를 아내가 불평없이 따라주고, 아내의 즉흥적 요구를 내가 불평없이 들어준다.

이러면서 여행을 다니는 게 엄청나게 피곤한 일이 아닐까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이 나의 타고난 성향이어서 나로서는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수행되는 일상사일 뿐이다. 만약 이런 철저한 계획과 준비를 안한다면 그것이 나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완벽주의 성향은 가족을 데리고 가는 여행에만 적용될 뿐이어서, 나 홀로 떠날 때는 대충의 목적지만 염두에 두고 특별한 계획과 준비 없이 떠나버린다 - 그래도 다른 이들 보기에는 철저히 준비했다고들 하니... 어쨌든 간에, 일상과 정돈으로부터의 일탈을 가장 큰 매력으로 삼는 - 또 스스로도 그러하기를 즐기는 - 여행길에서조차 이렇듯 완벽한 정돈을 추구할만큼 나의 식솔들을 향한 완벽주의 성향은 병적인 면을 품고 있다. 처자식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고 싶다는 사내의 욕심을 병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이 병적임을 안다. 자상함과 지배욕구는 종이 한 장 차이니까.

철이 들면서 조금씩 눈을 뜬 진리이자, 신을 알게 된 이후에 여러 성현들이 가르쳐 준 진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신에게, 삶의 흐름에, 우주의 섭리에 나를 내맡겨야만 내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었다. 도도한 강물의 흐름에 몸을 내맡길 때에만 자유자재의 래프팅이 가능하지, 그 흐름의 순간 순간을 자신의 뜻으로 파악하여 조정, 통제하려 들면 '내맡김'이 이루어지지 않아 흐름을 거스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내 삶에서도 주어지는 거대한 흐름에 평화로운 순종의 마음으로 나 자신을 내맡길 때 나는 일상의 지리멸렬함과 무수한 평범함의 족쇄들에 얽매이지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게 된다;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헌데, 내 식솔들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모든 예외성과 돌발성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 물론 이는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 오로지 나 자신의 좁은 안목으로 보기에 편하고 즐거울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만을 제공해주고자 하는 나의 욕심은 가히 병적이라 할밖에.

며칠 전 가족과 떠난 여행길, 경상북도 안동의 호변에 자리잡은 모텔에서 첫날을 묵었다. 호변 러브호텔의 뜻밖에도 널찍하고 전망 좋은 방에서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놀다 잠들었고 아내도 편히 잠자리에 든 다음 날 아침. 혼자 일어나 창가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천사의 얼굴을 하고 곤히 잠들어 있는데, 아침 햇살이 푸른 호수 표면에 어른거린다. 기도를 시작했다. 'I am Your servant...' '참 나'를 보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의 매혹에 사로잡혀 참 나를 보아야겠다는 의욕마저 일어나지가 않았다. 현상이 너무나도 완벽하여('너무 완벽하다'는 말이 되지 않겠지만) 실상(實相)으로 옮겨갈 의지가 일어나지가 않았다. 오직 찰나에 불과한 이 현상에 사로잡혀서...

허망함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신께서 허락하신 선물일 터, 깨달음으로부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앉은뱅이로 있는 주제에 감사의 웃음을 터뜨린다.

깨달음으로 가고자 하는 발걸음마저 잡고선 놓아주지 않을만큼 강력한 현상계의 행복, 그것의 중요한 부분인 나의 처자식, 그리고 그들에 대한 나의 완벽주의 증상 등을 주욱 한 자리에 펼쳐놓고 바라본다. 이만큼 행복한 것도 내 덕이고, 이만큼밖에 못하고 있는 것도 내 탓임을 잘 알겠다. 내가 손댈 수 있는 부분은 나의 완벽주의 증상. 그 옹졸함의 빗장을 풀어주면, 내 처자식의 삶이 나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것이다. 나의 완벽주의적 여행 준비는 그들을 지나치게 나에게 의존하도록 만들고 있을 따름이다. 지나친 자상함은 상대방을 구속할 따름이다. 현상계의 삶을 제멋대로 살 수 있는 도사가 못되는 나로서는, 주어진 정황들을 신중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아직 나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어린 딸들을 동반하는 여행 길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애비의 책무일 것이다. 하지만 어느 선에 가서는 나의 돌보는 손길을 완전히 떼어버려야 함을 알겠다.

얼마 전 케이블 방송에서 본 UFO 피납자에 관한 스필버그 감독의 미니 시리즈 'Taken'의 마지막 장면은 꽤 심오하고도 감동적이었다. 거의 예수님에 필적할만 한 초능력을 갖게 된 외계인과 지구인 간의 혼혈인 주인공 소녀가 사랑하는 부모의 품을 떠나서 위대한 종의 진화를 시험하기 위하여 외계인들을 따라가기로 결심한다. 대의를 위해 소의를 버리는 장면이다. 이때 소녀의 엄마는 자신이 뭐든지 다해서 돌봐주고 지켜주겠다며 떠나려는 소녀를 필사적으로 만류하지만, 이미 어느 경지의 깨달음에 다다른 그 소녀는 미소로써 엄마의 손길을 떼어버린다. 그녀의 미소에 모든 진실이 담겨 있었다: 아무리 사랑한다 하여도 엄마가 도저히 그 딸을 잡아둘 수는 없다는 것, 소녀의 삶은 스스로 선택한 더욱 큰 진실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엄마를 떼어내는 소녀의 미소는 모든 구도자가 향하는 그 길을 참 단순하고도 명료하게 보여준다고 느꼈다.

현상계에서의 완벽주의는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린 딸내미들을 보호하고 돌보는 데 있어서 완벽주의적 증상이 심하게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내가 현상계 안에서 간직하고 있는 두려움이 입증되는 것이다. 신의 절대적인 사랑을 믿는다면서 이런 두려움을 내면 깊숙이 지닌 채 산다는 것은 완벽주의자의 철저한 불완전성을 보여줄 뿐이다. 내가 신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믿고 나를 신의 종으로 내맡겼듯이, 나의 처자식에게도 동등하게 베풀어지는 신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믿고 그들이 신과 함께 크고 위대한 걸음으로 자유의 대로(大路)로 나아가도록 도와줌이 마땅하다.

그래서 당장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처자식들 팽개치고 나 혼자 유람 한 번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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