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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마음이 들뜨는 개강일, 어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나게 될까하는 설레이는
즐거운 마음으로 긴 전철 구간을 어떻게 지나왔는지도 모르게 금세 대학촌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아까 집을 나설 무렵만 해도 예상조차
못했건만, 저녁 무렵이 된 삼월의 서울 하늘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게 아닌가! 워낙 눈 속에서는 우산을 쓰는 일이
없는 낭만파인 나지만, 우산 없이 캠퍼스까지 십여 분을 걷다보니 머리부터
코트와 가방까지 흠뻑 눈에 젖어버렸다.
신바람 나는 첫 수업,
나를 소개하고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들여다보고 나서, 수업 사이의
쉬는 시간에 아무도 없는 복도 구석켠에 가서 전등을 끄고 창밖을
바라봤다. 폭설의 급습에 순식간에 새하얀 궁전이 되어버린 대학 캠퍼스의
밤풍경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드러내주는 새하얀 나무와
건물들은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신나는
수업을 모두 마치고 귀가하는 나의 몸은 다시금 여전히 내리고 있는
눈에 폭 젖어버렸다. 길이 막혀 오도가도 못하는 운전자들은 안됐지만,
전철로 돌아가는 나는 그저 즐겁다. 언덕배기에 있는 집까지 올라가는
경사진 길에서 발이 찍찍 미끄러져도 바보처럼 웃으며 올라갔다.
'눈이란
게, 그 미립자 하나 하나가 다 틀리다는 새하얀 눈이라는 게, 애초에
우리를 즐겁게 해주려고 만드신 건 아닌가요, 혹시? 신의 의도를 제가
알 도리는 없겠으나, 당신께서 만들어주신 눈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나의
마음이 당신의 신비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날 아침,
갓 유치원에 들어간 둘째가 가기 싫다는 걸 겨우 달래서 보내고, 집에서
일하다 점심 때 학교에서 먼저 돌아온 첫째를 발레 배우는 시민회관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오는데, 방금 유치원에서 돌아온 둘째가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저 위에서 엄마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었다. 간밤에 내가 실실
멍청하게 웃으면서 걸어 올라가던 눈 덮힌 그 길에서, 제
몸 부피를 두배는 되게 부풀릴만큼 방한복을 껴입은 채 뒤뚱거리며
걸어내려오던 딸내미가 애비를 발견하더니 냅다 뛰어오기
시작했다. 아이가 미끄러질까봐 나도 내달려서, 품에 뛰어든 아이를
번쩍 공중으로 치켜들어주었다. 애비를 꼭 껴안는 것이 마치 몇 달은
헤어졌다가 상봉하는 것 같다. "나나야[애칭],
오늘은 유치원에서 안 울었어?" 나의 첫 질문에 아이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으응, 오늘은 네 번만 울었어!"
아이와
집으로 들어가서, 몇 시간 동안 헤어졌던 회포를 풀어주고
일거리 챙겨서 집을 나서니 어느덧 첫째가 발레 끝나고 돌아올 시간이라,
아까는 혼자 알아서 돌아오라고 했었지만 방향도 같고 하여 같이
와주려고 시민회관으로 향했다. 실은, 요즈음 연일 발생하는 아이들
유괴 사건 때문에, 아내도 내심 내가 아이를 데려와주기를 바래는 눈치였고.
그런데 귀가길 코스가 뻔하여 길이 엇갈렸을 리도 없을 텐데, 발레 교실
앞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가 나오질 않는 것 아닌가. 알아보니 버얼써
발레는 끝났다는데. 아무래도 어디선가 길이 엇갈렸는가 보다 생각하고
집으로 길을 거슬러 돌아가며 아이를 찾아보았다. 이리저리 찾으며 집
부근까지 왔을 때는 발레가 끝난지 이미 사십 분은 경과했을 시간. 은근히
조바심이 난 아내도 연신 내게 전화를 해댔지만, 아직도 딸의 행방은
묘연했다. 눈 쌓인 경사진 길을 헤치고 다니자니 열이 났다.
결국
집 앞까지 다 돌아왔더니, 아이가 거기에 서있었다.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넣은 채, 골똘히 땅바닥을 바라보고, 발로 푹푹 눈더미를
쑤시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내가 여직껏 뭐하다 이제 왔느냐 물으니
아이는 부모의 조바심 따위엔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 가지고
놀다 왔다고 대답했다. 어쨌든 무사히 돌아왔으니 됐지, 아이를 집으로
들여보내고 나는 늦은 출근을 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나는, 첫째가
낮에 뭘하며 놀다가 늦었는지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자기는 쌓인
눈을 요리조리 밟아보며 밟히는 눈에서 나는 소리를 하나씩 다 비교해보며
오느라 늦었다는 것이다. 그래 무슨 소리가 나더냐 물으니, 예상했던
모범 답안인 '뽀드득'이 아니라, 굉장히 많은 다양한 소리를 흉내내는
것이었다. 사사삭, 뿌지직, 사박... 정말 많은 소리가 - 나는 기억해내지도
못할 정도로 - 나와서 자기는 그 소리들을 다 구분하여 듣고 있다보니 시를
쓰고 싶은 생각이 났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쓸까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에게 뭐라고 그러겠는가, 담부터는 빨리빨리
집에 돌아오라고? 눈을 청각적으로 깊이 '관찰'하고 자신이 발견한
다양함에 관하여 생각하는 와중에 시상(詩想)까지 떠올랐다는데,
스스로 그토록 큰 공부를 한 것을 칭찬 해주지는 못할 망정. 그래서
군말 없이 이렇게 말해줬다. "아-주 잘했어!"
오늘
아침에 뉴스를 들으니 간밤에 고속도로가 폭설로 꽉 막혀서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을 했다 한다. 갓난 아이를 태우고 가다 밤새 눈 속에 발이
묶인 부부들, 생각만 해도 막막하다 - 나 자신 몇 년전 기록적인 폭설
때 비슷한 경험을 했었기에. 하지만 어쩌겠나, 지금 여기서 눈을 즐길 수 있는
나로선 미안하지만 즐기는 수밖에. 그래서, 어짜피 눈 땜에 자전거도
못타고 하여, 오늘은 야트막한 산을 도보로 넘어서 출근했다. 산 속에
펼쳐진 작은 평원의 쌓인 눈을 바라보니 가슴이 탁 트였다. 그야말로
미답의 순백색 처녀지를 내가 첫 발자국을 새기며 가로질러 왔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설원을 횡단하며 딸내미가 들었다는 그런 소리가
나는지 나도 들어보았다. 내 귀엔 그저 '푹푹' 소리밖에 안들리는구만.
눈이
많이 내리면 나는 꼭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눈에
뒤덮힌 벌판의 고적한 빈 집에서 라라와 밤을 보낸 지바고가 새벽에
일어나 책상머리에 앉아 한기 속에서 시를 쓰던 장면. 순백의 설원은
우리의 성정을 감탄시키는가 보다. 어릴 땐 순백색이 깊어 푸르스름한
빛까지 내는 눈이 엄청나게 쌓이는 것을 무서워 했던 적도
있었다. 특히 '설녀'라는 괴기극을 본 이후로는. 그런데, 순백의 공포
또한 매력적이지 않은가.
이번의 폭설이 내리기 전날, 나는 선·악·미·추를
내포하는 완전한 포용성과 오직 진선미 만을 빛나게 드러내는 순수 사이의 양분법적
구분을 가지고 조금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나는 전자를 믿지만, 후자
또한 믿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지만, 실로 그러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데 엄청나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흰 눈을 보고 좋아하는 내 마음이 순수다.' 과연 그러한가? 몸을 꽁꽁 얼릴 듯한
설녀의 공포에 사로잡히던 어릴 적 느낌, 얼어붙은 눈의
궁전 속의 시인을 보던 사춘기의 감동, 이런 것들이 눈 속에서 되살아난다.
이번의
눈을 나는 아주 많이 즐겼다. 평소의 조금 골치 아픈 관념적 교통정리
버릇도 잊어버린 채. 아홉 살 먹은 딸이 가르쳐준 방식대로, 나에게
주어지는 자연의 선물들을 깊이 음미하는 것 그 자체를 아무 생각
없이 즐겼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간에, 일단 나는 신께 감사하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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