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두 갈래 길과 교육 (2004/7/2)
 

주로 교사 지망생이나 현직 교사를 위한 트레이닝으로 제공되는 나의 강의 마지막 날에, 그동안 잘 드러내지 않던 나 자신의 주관적 의견을 제시했다. 나는 이를 두 갈래의 인생 시나리오로 제시했다. 그 첫 갈래 길인 (A)는 학원, 과외, 선행 학습 등으로 점철된 학창시절과 이른바 SKY 대학 입학, 엘리트 대열 합류, 사회적 출세, 그리고 자식 부양한 후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둘째 갈래 길인 (B)는 자유롭게 많이 놀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 하며 자라는 학창시절과 입시에 있어서의 상대적으로 저조한 성취, 엘리트 대열에서 벗어난 커리어 형성, 자신만의 길 추구, 그리고 자식 부양한 후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겠다.

대개 어느 부모라고 자식이 A의 길을 걷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허나 A와 같은 학창시절을 보냈을 경우,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self-regulated learning ability)이 떨어지고, 학습에 있어서 타인 의존형이 되며, 출세지향형 인간으로 만들어지기 십상이고, 더 나쁜 경우에는 장기적으로 볼 때 평생 학습능력에 해를 입게까지 될 수도 있음을 나는 학생들에게 강조했다. 그에 반해 B의 길을 자기주도적으로 걷게 되는 경우, 자아실현을 지향하는 독립적 인간형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제시하였다(물론 이는 지나친 단순화이지만 논의의 전개를 위해서).

그런데 많은 학부모들은 이런 부정적 조짐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아이를 A의 길로만 몰아가고, 그러한 그들의 심리적 기저에는 미래의 생존 보장을 위한 두려움이 많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두려움 때문에 '안전한 길,' '보장된 길'인 A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금 묻는다: 과연 A가 B보다 안전하고 쉬운 길인가? 실은 둘 다 똑같이 위험하고 고된 길 아닌가? 입시 등의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한 엘리트의 험난한 길에도 다음과 같은 '위험한' 복병들이 도사리고 있다: 일중독(workaholic), 가정불화, 기러기 아빠, 주부 우울증, 사교육 과잉 투자, 탐욕, 허영, 강남 증후군, 명품 중독, '일류' 배우자 구하기 위한 결혼 시장 진입, 또다시 자녀 교육에 집착하여 후세에게도 A의 길 강요, 비슷한 악순환 다시 시작.....

나는 삶에 대하여 가장 적극적인 자세를 갖도록 해주고 또 자아의 최상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질로 '마음의 평화'를 꼽은 후, 마음의 평화를 지닌 엘리트가 생각 보다 얼마나 소수인가 하는 점과 동시에, B의 길의 적극적인 추구가 마음의 평화를 배양해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을 수 있다는 점 등에 대하여 나름대로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그날 밤 제자 C로부터 심각한 이메일을 받았다. 한 아이의 어머니인 그녀는 나의 마지막 강의 내용에 충격을 받고 혼돈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피로한 몸을 다잡고 다음과 같이 답신을 보내주었다.

         


[중략] 물으신 내용, 하나씩 답변 드릴게요.

C: 오늘 강의는 제마음을 가장 심하게 흔드는 계기가 되었기에 늦은 밤임에도 메일을 보내게 된것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중략] 용기 없는 부모이자 무지한 엄마이기에 아들을 대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돌아와 잠든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제 안에서 일어나는 말하기 힘든 죄책감에 마음이 매우 아픕니다.

한: 걱정마십시오. 저도 저 자신의 용기 없음과 무지함, 아량 부족, 더러운 성질 등등으로 인해 제 자식들이 받아온 피해를 생각하고는 한심한 나락으로 빠지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죄책감이 세상에서 제일 견디기 힘든 정도의 고통과 후회를 동반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죄책감에 빠져버리지 않습니다. 제가 잘한 것도 기억해본답니다. 그러면 그렇게 나쁜 아빠만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조금씩 더 나은 아빠가 되어감을 믿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부모란 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C씨 스스로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셔야 합니다.

C: 내 아이에 대한 철학도 용기도 부족하면서 뭔가 .... 하겠다고 하는 제자신이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교수님의 강의와 위배되니 오늘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한: 어머니에게는 철학이나 용기에 앞서 한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그래서 위대합니다. '허영'이나 '욕망'이 아닌 깊은 사랑으로 자신의 자식을 바라볼 수 있는 어머니는 진실로 다른 사람의 자식들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C씨의 아들에 대한 사랑을 믿으세요. 우리들 각자가 지극히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허영이나 욕망에 찌든 덜된 사랑(집착)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낮고 초라한 모습에 눈뜨는 것은 자신이 소중함을 깨닫는 첫걸음임을 또한 저는 믿습니다. 저도 그랬었거든요.

C: B의 경우 아동기의 놀이는 무엇입니까!

한: 저는 사람의 본질이 사랑임을 믿습니다(깨달았습니다). 사랑에 위배되지만 않는다면 아이가 스스로 하고 싶은 모든 놀이가 다 포함되지 않을까요? 요즘 제 큰 딸은 매일 같이 동네 애들과 흙파고 나뭇잎 모으고 놉니다.

C: 성공의 기준은 있나요? 자기 만족인가요?

한: 성공의 기준은 자신의 최고를 드러내는 삶을 살았는가의 여부가 아닐까요? 저는 저 자신의 최고를 드러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직업도 안 잡고 혼자 땀 뻘뻘 흘리고 삽니다. C씨의 최고는 C씨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단순한 자기 만족과 다릅니다. 사람은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도 어느 정도 자기 만족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자신의 최고의 잠재성을 드러내주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제 아이들이 자신이 타고난 잠재성의 최고를 드러내는 '성공'한 삶을 살기를 바라지 그들이 사회가 부러워하는 엘리트가 되기를 조금도 바라지 않습니다. 자신의 최고를 드러내서 말하자면, 자아실현한 사람에게는 부나 명예, 또는 엘리트 지위 등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경우도 많이 목격합니다.

C: 엘리트 부류만이 사교육비 감당이 힘든가요?

한: 요즘은 누구나 힘들다고들 하더군요.

C: 그들이 모두 불행한가요? 어느 부류이거나 어떻게 단정지어서 말하기 곤란합니다.

한: 물론 엘리트들이 모두 불행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제 주장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조적 수사법을 구사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엘리트가 폄하되었습니다. 허나, 제가 개인적으로 만나본 수많은 엘리트들 중 행복한 미소를 나눌 수 있는 이들의 수는 매우 적었습니다. 당연히, 단정지어서 말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훌륭하고 행복하고 마음이 평화로운 엘리트도 물론 있으니까요.

C: 제 혼돈을 잡아주세요. 수업내용에서 둘다 위험하다고 하셨어요. 안전하고 위험한게 무엇이죠?

한: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생노병사를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길에는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신체적 위난을 당할 위험, 감정적 상처를 입을 위험,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받거나 헤어질 위험, 믿은 이로부터 배신당할 위험, 재산상의 손해를 볼 위험, 추구하는 일에서 실패할 위험 등등 이루 헤아리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인생에서 안전을 추구한다고 해서 집 밖으로 조금도 나가지 않고 움츠려 드는 것은 바보입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신중함은 유지하면서, 용감하게 밖으로 뛰쳐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잠재성을 스스로 깨닫고,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어 자신의 최고를 발휘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체로 'A'의 길에선 이루기 어렵고, 'B'의 길에서나 추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위험한 길, 모험을 피할 수 없는 게 인생일테니, 우리의 아이들이 용감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결정으로, 자신의 능력으로 그 인생의 항로를 개척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학원과 과외의 과잉, 부모의 과보호는 그런 교육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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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왜 이렇게 할 말이 많은지요... 강의 시간 한 시간은 너무도 부족합니다. 제 안에 차고 넘치도록 들어 있는 것들이 나오고 싶어 꿈틀거립니다. 아무래도 조만간 집필에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C씨, 혼돈을 두려워 마세요. 제가 듀이의 이론을 수업 때 말한 적 있죠: 혼돈이 깊은 성찰을 유도하고, 깊은 성찰을 통해서 진실한 배움(learning)이 발생한다고. 지금 C씨의 혼돈이 축복으로(!) 주어졌음을 아시고, 사랑스런 아드님을 더욱 사랑이 가득한 눈길로 바라봐주세요.

제가 일으킨 혼돈, 저는 선생으로서의 제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만, 그래도 책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C씨를 위하여 기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빕니다.

- 한석훈 올림

         


There is no safe way; there is only loving w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