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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후반, 주어진 모든 가치관을 회의하라는 철학자들의 말씀에 경도되어
사람의 본성에 대해서도 회의를 해본 적이 있다. 사람은 본래 선한가,
악한가? 당시의 내게는 절대적으로 선한 것만 같았던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도 - 지금은 모성애도 천편일률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갖고
있지만 - 이런 질문의 틀로써 바라보면 반드시 이타적이지만은
않다는 논의가 가능해졌다. 자신보다도 자식의 행복을 더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도, 그렇게 행복한 자식의 모습을 보아야만 자신의 마음이 편하기
때문에, 그러한 자신의 마음의 평안함을 위하여 자식의 행복을
위한 모든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를 전개 할 수도
있으니까(정치철학자 홉스가 자신의 자선행위가 궁극적으로 이기적인
동기에서 기인하였노라고 강변한 것처럼). 자신의 몸을 버려서라도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도, 그리 하지 않고 자식의 육체적
고통을 바라보는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도저히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기꺼이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라도 자식을 위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이런
주장은 인간이 육체보다 정신을 중시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아야 하겠지만). 이성을 도구로 모든 것을 회의하던 젊은 나의 눈에는
이 세상에 절대적이고 순수한 사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모든 것이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행동들이다. 모든 것이
결국은 이기적인 행동들일 뿐이다. 나는 이렇게 세상을 보았고, 이런
자신의 이기적 본성에 대한 솔직한 인정이 그래도 선동적인
신화와 배타적인 편견과 율법학자적 위선 등등과 같은 세상의
'더러운' 것들로부터 나 자신을 분리시켜준다고 믿었다.
최근
들어 사람의 본성과, 개체로서의 인간의 이기성, 이타성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과 토론할 기회가 몇 차례 있었다. 여러 가지 논의가 오갔다.
인간 행동의 이기성과 사악함 자체를 부정하는 이는 없는 듯 하였다.
그러나 논의가 오감에 따라, 그런 부정적인 인간 행동이 인간의 선천적인
본성인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습득된 행동일 뿐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라졌다. 인간의 유전자가 이기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음으로 인하여 그
유전자의 발현체인 '나'또한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일까? '나'라는
존재를 유전자의 레벨로 환원시켜 이해하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타당할까?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계산 없이 이타적인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이
이기적인 것일까? 아니면 이타적인 행동을 해야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이타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생물학적으로는
이기적인 존재인 인간이 사회 환경 속에서 이타적인 행동에 대한 규범적
보상을 받게 됨에 따라 후천적으로 이타적 행동 양식을 배우게 될 뿐인
것일까? 혹은, 인간 사회의 이타적 가치에 대한 전반적인 지지가 집합체로서의
인간의 생존과 보존 추구 이전에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을 가지고 벌이는 토론에 답이 있기는 어려운
일이겠다. 그저 각자의 의견만이 있을 뿐. 나 자신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가? 실은, 나는 알고 있다, 그 근본적인 답을. 인간의
현상계에서의 행동이 어떻게 드러나는가와는 상관 없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 영성 차원에서 -
선한 사랑의 존재임을 알고 있다. 그와 같은 엄청난 답을 나같은 범인이
어찌 알았겠는가? 단순히, 신께서 그러하다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알았을
뿐이다. 그것은 더 이상의 회의가 필요치 않고, 이성을 도구로 쓰는
회의가 들어설 자리가 아닌 곳에서의 앎이었다. 참으로 단순무식한 앎이다.
굳이 인간의 인식의 여러 모드(mode)들에 대한 지적인 분류 방식에 따르자면,
논리, 그리고 직관마저도 넘어서는 곳에서 초월적 존재가 베풀어주는
'계시'를 통한 앎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앎은 나 혼자만
써먹는 앎이다. 타인에게 나의 이러한 지극히 개인적인 앎을 소통할
방법도 모르고, 이런 앎을 몸으로 드러내기에는 나라는 존재가 턱없이
부족한 인간이다. 사랑을 본질로 지니고 있는 인간에 대한 가르침은
받았으되, 그 가르침을 지니고 살기에 스스로가 너무도 미천하여, 감히
그 가르침을 어떻게든지 품안에 간직하고라도 있어보려고 아둥바둥거리며
살고 있는 셈이다. 최상의 무공에 대한 고귀한 비전(秘傳)을 우연챦게
수중에 넣고는, 그걸 잃지 않고 지켜보려고 바둥거리는 무술의 초짜와도
같이. 무술의 초보는 그 비전을 써먹을 수가 없다. 사랑의 존재인
인간에 대한 앎은 지금의 나로서는 써먹을 수가 없는 앎이다.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이기성, 이타성에 대한 토론에 참여하면서, 나의 개인적인
'앎'을 써먹을 수가 없는 나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논의의 결론에 이르는 것이 이성적인 논증의 범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며,
결국은 개인의 선택과 결정에 의하여 개인적으로 가닥이 잡힐 수밖에
없지 않느냐.' 또한, 그러한 개인의 선택과 결정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준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닌 것 같고, 그저 어느 쪽을 선택하거나
결정하는 것이 한 개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아니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는 쪽으로 논의의 방향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외면으로
드러낸 의견은 아니었으나, 나는 내심, 인간의 본질적인 이기성을 굳게
신봉하는 사람들이 현재의 삶 속에서 지극히 부정적인 인간관계를 체험해온
이들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이런 종류의 의구심은
그 사람들의 이성적 역량에 대한 폄하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기에 겉으로
드러낼 성질의 것이 못된다. 그렇다 해도, 사람의 의견과 시각이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배태된 것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역사학자들이
기본적으로 모든 사상가들을 그러한 시각으로 의심함으로써 사상사를
서술하는것과 같이.
그중 한 토론의 참석자 중 한 사람은, 자신과
다른 참석자들이 만나서 토론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모두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에게는, 인간의 본질적인 이타성을
옹호하는 '신앙인'인 나보다도 그가 더 몰이성적이고 도그마틱한
기계론적 이성의 '신자'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기적인 동기' 말고도
더 많고 다양한 다른 동기들에 대한 나의 상상력을 확장하고 싶어졌다.
내가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행동 뒤에는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동기들이
있을 수 있지만, 동시에 그밖에도 여러 밝고 유쾌한 동기들이 있기도
한데, 후자에 대한 상상력이 왜 그에게는 결핍되어 있는 것일까. 그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 난 후, 그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실은, 내가 그 토론에 참석한 여러 가지
이유 중에는 그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다양한 인간의
동기를 '이기심'으로 분류해버려야 하는 그의 사고가 안쓰러웠다.
나는 다음 번 기회에도 그와 즐거운 토론을 벌일 생각이다.
이성으로
답이 안나오는 토론 속에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답'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할 수가 없었다. 이는 내가 소심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광신자가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가 그런 '답'을 타인에게
외칠만 한 인간이 못되기 때문이다. 내면에 '앎'과 '답'이 있어도 그걸
꼭 밖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구를 가지고 있어도 그걸
꼭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첨단 무기를 구입했다고 꼭 그걸
써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무기를 보유, 유지, 조종할 베이스까지도
보유하고 있어야만 그 무기를 써먹을 수가 있는 것이다. 신께서 내게
'앎'을 주셨어도, 나는 그 앎을 써먹을 베이스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음을
절감하였다. 왜 신께선 내가 써먹지도 못할 앎을 주셨을까? 물론 써먹을
때가 꼭 올 것을 아시고 주셨겠지...라고 나는 믿고 산다. 앎은 실천에
의해서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중고생 시절, 문제집의 문제를
도저히 풀지 못할 때, 책의 맨 뒷장을 펼쳐서 해답을 컨닝했던 기억이
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답을 도저히 내릴 수 없을 때를 위하여 맨
뒷장의 해답만 미리 훔쳐보고, 잊지 않도록 그걸 여기에 베껴놓아 둔다:
'사람은 사랑의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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