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천천히 가며 정리하는 일상 (2005/7/31)

1.

뭐니 뭐니 해도 인간이 현세에서 원하는 건 생물학적으로 조건지워져 있다. 남자는 예쁜 여자를 원한다 - 그렇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 자신의 씨를 퍼뜨리기 위해서는 건강한 짝이 필요한데, 육체적 건강이라는 짝의 '품질'을 가장 피상적으로 알려주는 시그널이 균형 잡힌 외모라서 그런가 보다. 여자는 돈 많은 남자를 원한다 - 그렇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 자신의 새끼를 안전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물질적 풍족함이 필요하고, 이를 보장해줄 것으로 보이는 가장 피상적인 - 그러나 가장 합리적으로 현실적인 - 싸인이 돈이라서 그런가 보다. (남자가 여자 보다 더 돈을 탐내기도 하는데, 남자는 그 돈 벌어서 '여자'에 - 배우자든, 애인이든, 홍등가든 간에 - 다 쏟아붓기 일쑤다.) 이런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성향' - 또는 '습성' - 들이다. 많은 남자가 미인을 좋아하고 많은 여자가 부자를 좋아하는 것을 손가락질 하고 비난하는 건 비현실적이다. 사람의 타고난 성향이 자신의 육체적 자아의 생존을 보존하는 것일진대, 그러하기 위하여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손가락질 하고 비난하는 건 어리석다. 나 자신은 안 그런가? 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우연치도 않게 깨치게 되는 이상한 경우가 알 수 없는 우리네 삶에서는 발생한다. 그걸 깨쳤으면 깨달음을 따라서 살면 될 것이고, 그리 하지 못하여 미색을 밝히는 남자와 돈을 밝히는 여자와, 그래서 항상 이기적인 인간들을 비난하는 건 온당치 못하다. 나의 구도의 절실함을 타인도 반드시 나누어야 한다는 심각함이 지나치면 종종 나와 타인 모두에게 피해를 끼친다.

2.

내가 삶의 신비 속에서 자신의 철저한 무지에 대해 아주 조금 깨친 것이 있어 삶의 태도를 바꾼지 몇 해, 이제 수행의 초반부가 대충 지나가고 있는 것도 같다. 더 이상 나의 이기적인 성향이 괴롭지도 부끄럽지도 않고 자신을 그냥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만, 동시에 이기심 보다 더 큰 진짜 나의 본성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제 몸뚱아리가 제일 귀한 것 같고, 예쁜 여자가 보기 좋고, 돈이 생기면 기분 좋으나, 그런 것들에 사로잡히지는 않고 산다. (장담이 아니라 관찰이다.) 예전에는 늘 가슴 속에 꿍치고 있는 불만 덩이들이 있었으나, 그런 것 별로 남아 있지 않고(한 두 가지 제외하고는), 싫어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도 마음 속에 없다. 이만하면 대체로 착하게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나의 관찰을 보강해주는 것은 나에 대한 타인들의 칭송이다. 많은 이들로부터 거의 주기적으로 내가 착하고 현명하다는 칭찬만 받지, 욕을 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 칭송을 듣게 되면 발현되는 유쾌한 감정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게 다일 뿐, '진짜 나'가 칭송에 신이 나서 정말로 지가 잘난 줄 착각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비판이나 비난을 듣는 경우도 드물게 일어나기는 하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의 무능함을 - 지적이거나 도덕적인 - 비판한다고 하여도, '그럼 정말로 나는 무능한가 보구나'하고 받아들이고 마니 문제가 되지를 않는다. 화도 나지 않고 변명도 하지 않는다. 나의 무능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데 그 이유는, 내가 늘 나 자신으로서만 살아왔지, 내가 아닌 가짜의 나로, 그림자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고, 내가 진짜 나로서 살아왔는데 내가 어떤 측면에서든 무능한 것으로 판정이 난다 한들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무능한 것을 알려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비판이나 비난이 다 축복이고 은총으로 주어진다는 '신과 나눈 이야기' 식의 가르침을 내면화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 그 가르침 지니고 살고 있지만 -, 내가 나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절대적인 우선순위를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사는 게 평화롭다.

3.

시원한 소나기가 반갑다. 고추 밭 옆 길에 핀 맨드라미, 어릴 때는 그렇게 밉게 보였던 그 꽃, 삼십 여 년만에 다시 만나보니 어쩌면 이리도 아름다운지. 자주 빛 맨드라미에 황금 빛 노을 그림자 비스듬히 머물 때, 꽃 위에 맴도는 얌전한 벌 한 마리. 나 혼자 즐기는 삶의 정경들은 참으로 상냥하고 친절한데, 세상 문 열고 쑥 들어가 보면,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독설, 악의, 비난, 아집, 그리고 그것들의 무딘 칼날에 상처 입고 뚝뚝 피 흘리는 수많은 이들. 세상만사 돌아가는 원리를 모르고 타인들의 소중함은 까맣게 잊은 채 천방지축 이기심의 칼날을 휘두르며 그것이 삶의 전부인 듯 열을 올리는 어리석은 이들, 자신의 독설과 악의와 비난과 아집으로 결국에는 자신들이 처참하게 피흘리게 될 것이 그다지도 안 보이는가? - 하긴, 나도 과거엔 전혀 안 보였었지. 지나치게 심각한 이들은 구도도, 정의도, 이익도 다 놓친다. 그들의 모습에 슬퍼 하고, 그들이 너무 멀리 헤매기만 하지는 않기를 기도해본다. 슬픈 세상으로부터 나에게로 되돌아와 영혼의 자전거 길 시원하게 달리는 나에게 맨드라미는 다시 한 번 상냥하게 인사한다. 고맙다 맨드라미야, 이제 보니 너 정말 예쁘구나.

4.

과거에 지고 살았던 무거운 감정적 짐꾸러미들, 모든 과거의 삶의 순간들을 다시 살아보기 위한 시도를 해오는 가운데 죄다 어깨에서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 같다(확언하지 않는 것은 아직 내가 모르지만 짊어지고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 나와 '나쁜' 관계를 맺었거나, 나를 해꿎이 했거나, 나에게 피해를 끼친 사람들에 대한 나쁜 감정이 내 안에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찾아내려 해도 안 보인다). 다 그럴만 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관계들이 발생했던 것이고, 그렇게 일어나지 아니 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 일어났던 일들이기에[내가 좋아하는 영어 표현: 'It could not not happen.'], 나는 그 악역들을 맡아줫던 이들에게 고마워 한다. 그래서 사는 게 평화롭다.

예전에 일 보러 자주 가던 기관에서 한 점잖고 연세 지긋한 학자가 기관의 관료와 대판 싸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학자 양반이 그 기관에를 5년 여 동안 출입하면서, 나이도 아래인 그 관료에게 꼬박 꼬박 인사를 해왔는데, 그 세월 동안 관료는 한 번도 제대로 답례 인사를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학자 양반은 어느 날 느닷없이 분노가 폭발하여 그 관료에게 사람들 앞에서 욕을 바가지로 퍼붓고 개망신을 줬다는 것이다. 5년을 가슴 속에 화를 품고서도 줄곳 점잖게 인사를 하며 그 관료의 변화를 바랬던 그 사람의 정신적 노고가 안쓰럽다. 나라면 서너 번 인사를 해보고 그쪽 반응이 없으면 더는 안했을 텐데. 너무 천사틱하게 살아가는 것도 오히려 무시무시한 분노의 화염을 터뜨릴 위험을 안고 있는 것 아닌가? 자신에 대한 정신적 혹사도 일종의 죄가 아니겠는가. 이 복잡한 인간 세상에서 어찌 모든 사람들과 호의적이고 친절한 관계만을 만들 수가 있겠는가. 해볼 만큼 해보다 아니다 싶으면 선을 긋는 것이 나의 스타일인 바, 수행을 하고 착해져도 그 스타일이 어디 가지는 않는 것 같다. 나의 스타일을 유지하며 가는 길이 편하다. 사람들은 왜 너는 네 편한 것만 하고 살려 하느냐 꾸중을 하지만, 평화가 공짜로 주어지는 건 아니다.

5.

수행에는 '경지'라는 것이 있는가 보다. 난 그런 걸 잘 모른다, 가르쳐 주는 이가 없어서. 신선과 같은 경지에 오른 이의 얘기를 들으면 신기하고 황홀할 뿐, 왜 나는 여태 그런 경지의 발끝도 못 쫓아가는가 하고 자책하거나 조바심 내지는 않는다. (죽어서 신께 여쭈면 다 가르쳐주실 테고, 지금의 나의 코스도 다 사랑의 은총으로 주어진 것임을 알고 있으니까.) 나 자신의 경지에 대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 몇 가지 있다: 내면의 평화의 항구성, '깨어있음'의 (최소한 간헐적인) 지속성, 행이든 불행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간에, 내가 의도하고 믿는 바대로 세상 일이 돌아가는 것을 알아채리는 순간 등등. 이런 요소들이 일관되게 몇 달 이상 지속되면 좀 자신감이 생긴다. 바로 그때 절벽 끝에서 발을 한 걸음 내딛여 보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리거나, 아니면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새 길이 나타나거나 한다 - 인디애나 존스 3편에서 처럼. 허나, 이것도 과장이다. 극적인 업그레이드가 일어났던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그 업그레이드의 정도라는 것도 아주 미미할 뿐이었으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수행의 경지에 대해서 내가 배우게 되는 점이 있다면, 모든 게 참 느릿느릿 일어난다는 것이라 하겠다. 자신의 무지에 대한 자각도, 유치한 감정을 다스리는 능력도, 일상에서 깨어 있는 순간을 확대하는 것도, 자아 내면의 화해를 구하는 것도, 경전이 알려주는 우주의 비밀을 이해하는 것도... 아무리 서두르려 해도 서둘러지지가 않는다. 무리를 하면 꼭 그 대가를 치루게 된다. 사회의 개혁을 회의하고 점진주의적 변화만을 유일한 길로 보았던 죤 듀이를 생각하게 되고, 현상계의 원리를 깨닫고 난 후에도 끝없는 적들과 대결을 이어나가야 했던 매트릭스의 네오도 생각하게 되고, 끝없이 투쟁한 네오처럼 죽는 날까지 수행과 공부와 연구를 성실하게 추구했던 융에 대한 한 길벗님의 말씀도 생각하게 된다. 이런 느리고 점진주의적인 성실을 가능케 하는 초월적인 요소가 혹시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나는 이미 다 이루었다'거나, '이곳이 이미 천국이다'와 같은 메시지에 대한 신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메시지를 믿을 때 그 무엇도 서두를 필요는 없어진다. 혹시 이순신 같은 인물도 이미 다 이룬 것을 알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도 그 엄청난 반대와 탄압과 방해와 오해와 현실을 죄다 무시하고 그렇게도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는 게 정녕 인간에게 가능한 일일까?

이렇게 천천히, 낮은 정신적 계발의 수준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내게 주어진 길이라는 것에 대하여 조금도 불만은 없다. (이순신처럼 탄압 받고 핍박 받았다면 이런 말 못하겠지만.) 실은, 내가 너무 서둘렀던 것이 문제였다는 생각도 든다. 느긋하게, 천천히 가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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