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여행 (2005/11/8)
 

© Suk Hoon Han                                                                                                                                                                                  
 
 

11월의 아침,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다. 차가운 공기, 비스듬히 비치는 햇볕, 그리고 아침부터 파란 하늘에 물들어버린 철없는 내 가슴. 이십 대에는 일년 중 5월을 제일 좋아했었는데, 이제는 11월이 더 좋다. 할 일은 많으나 오늘 꼭 하지 않는다 해서 탈이 날만 한 일은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오후를 자전거 여행으로 제껴버리기로 결심했다. 자전거에 기름칠 좀 해서 평촌 연구실로 몰고 가서 오전 일을 마치고, 대충 점심을 때운 뒤인 오후 두시 경, 이미 세 번째인 서울 남단 일주 여행에 나섰다.

의왕의 백운 저수지에 고인 물이 평촌 벌을 따라 흘러내려가는 학의천변에는 잘 포장된 자전거 도로가 안양천과의 합류 지점까지 이어져 있다. 투명한 대기를 뚫고 거침없이 쏟아지는 11월의 햇살에 하천변의 갈대는 황금빛으로 물들어 하늘거리고, 강둑 위에 줄지어 서있는 은행나무의 샛노란 이파리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반짝이는데, 안양천변의 고층 아파트들은 햇살을 담뿍 머금어 눈이 부실만큼 하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길떠나고 싶은 방랑기가 꿈틀거린다. 올 가을은 이 자전거 여행으로 때우자. 공부 일정도 많이 밀려 있고... 하천변에 나와서 걷거나 자전거 타고 있는 이들은 거의 다가 직장에 나가지 않는 노인과 주부들뿐이거늘.

안양에서 시흥까지의 안양천변 자전거 길은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아서, 도중에 공사 현장도 있고 비포장 잡초밭도 많다. 길이 끊긴 곳에서는 강둑 위로 자전거를 낑낑대며 끌고 올라가서 찻길로 달리다가 다시 천변의 도로로 내려갔다가를 반복하며 가다보면, 광명시 쯤부터는 제대로 된 자전거 길이 다시 나타난다. 양천구에 접어들면서 쭉 곧게 뻗은 잘 포장된 도로 위를 힘껏 질주해본다. 산지 3년밖에 안 된 내 자가용, 삼천리표 '준산악용 자전거'는 그간 과로한 탓에, 무리하게 산길을 달린 탓에, 또 오토바이와 충돌하는 사고도 겪은 탓에 이제는 고물 티가 역력하다. 조금 경사진 길에서 페달을 힘껏 밟을라치면 삐걱대는 소리를 요란하게 낸다. 그 고물 자전거 위에 걸터앉아 기를 쓰고 달리는 인간은 썬글라스 낀 것만 빼면 허름한 바지와 외투 차림이 마실나온 동네 아저씨 모습과 다르지 않은데, 헬멧에 고글에 울긋불긋한 자전거 복장 제대로 갖추고 고가의 번쩍이는 자전거를 모는 멋쟁이들 뒤를 삐걱대면서 따라 달린다. 싸이클 선수같이 멋지게 갖추고 질주하는 이들 뒤를 죽어라고 쫓아가노라면, 그네들은 허름한 고물 자전거 아저씨가 같은 속도로 따라오는 게 자존심이 상하는지 더 속력을 내어 내빼려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열심히 페달을 밟다보면 어느새 목동을 지나 앞이 탁 트인 한강변에 다다른다. 안양천이 한강과 만나는 이곳에서 우회전해서 성산대교와 선유도를 지나면 곧 여의도에 진입하게 된다. 여의도 선착장 앞에서 자전거에서 내려 쉬었다.

평촌에서부터 약 두 시간을 달려왔다. 여기에서 두 시간 남짓 더 달려 과천까지 가면 시(市)를 네 곳이나 거치게 되는 셈이다, 안양시, 광명시, 서울시, 과천시. 나는 왜 이렇게 열나게 달리는가? 오늘 일터를 박차고 밖으로 나온 것은 11월의 햇살과 하늘을 다 품어보고 싶어서였다. 자신과만의 대화를 나누는 자전거 여행길에서 오늘 내게 주어진 최고의 자연의 선물을 맘껏 안아보고 싶어서였다. 헌데 그러고 싶었다면 강가에 나와 그냥 얌전히 앉아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아도 될 터인데, 왜 굳이 그렇게 힘들게 달리는가? 아마도 타고난 성질이 워낙에 그 모양인가 보다.

스피드가 좋다. 오토바이는 과부 만들까봐 못타겠고, 바람을 가르는 자전거 정도의 스피드가 좋다. 게다가 자전거를 달리면 덤으로 뱃살도 빠지지 않는가. '이 나이에' 뱃살 빼서 날씬해지려 하는 건 바람 피울 껀수라도 있길래 그러는 게 아니냐며 의구심을 표명한 지인들도 몇 있었지만, 그런 껀수 챙길 수작이라면 옷이라도 좀 멋내서 입고 다니겠다. 항상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직업의 성격상, 이렇게 일부러 땀 빼고 운동해주지 않으면 사십대의 건강을 제대로 챙길 수 없지 않는가.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따라 건강한 것이 당연한 일. 예전부터 견지해온 나만의 돈 계산법인데, 벌이가 시원치 않을 때는 열심히 운동해주는 게 돈 버는 일이라고 믿는다. 몸 상해가며 일해서 나중에 병원 신세 지느니, 그렇게 번 돈으로 건강 보험 잔뜩 들고는 미래에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질병에 대비하며 사느니, 일은 좀 덜 하더라도 열심히 운동하는 게 나름대로 돈 버는 길이다 라고 믿는다. 한심한 산수 계산일지 어쩔지 잘 모르겠지만. 치료보다는 예방이 더 적극적인 삶의 자세 아닌가?

여의도 강변의 벤치에 앉아,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 강물 저 건너 편의 차들과 빌딩들을 바라보았다. 자연이 아니라 자본의 뜻에 몸을 내맡긴 이 세상은 숨막힐 정도의 속도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최고 속도는 기껏해봤자 자전거 정도인데, 세상은 참 고속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나도 내 몸과 마음을 자본의 뜻에 기탁하고 저 경주의 트랙에 뛰어든다 하였을 때, 만약에 내가 저 스피드를 따라가지 못할 경우엔 내 몸과 마음을 낙오자로 전락시킬 것이고, 만약에 내가 저 경주에서 남들을 제치고 앞으로 치고 나갈 경우 역시 내 몸과 마음은 영적인 비본질로 치닫게 될 것 아닌가. 내 성미에 저 경주에 뛰어들어서 대충 중간 정도로 가는 건 스스로 용납하지 못할 것 같으니, 능력도 안 되는 주제에 기를 쓰고 남들 앞서보려다가 엔진 과열로 레이스에서 탈락할지도 모르지. 그래, 이것도 다 제 팔자 소관이다. 내 스스로 내 길 뚫으면서 혼자 자전거나 타고 갈길 가자. 저쪽에서 세상의 레이스가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건 말건.

여의도에서 시작하여 올림픽 대로 아래의 강변에 나있는 자전거 도로는 조금 구불구불하고 스릴도 있다. '과속 절대 금지' 표지판은 무시한 채 다시금 자전거를 쌩쌩 달려본다. 동작대교와 반포대교를 지나쳐 한남대교까지 열심히 달리니 숨도 가쁘고 다리 힘도 빠진다. 강 건너 편으로 강북의 타워호텔이 보이는 지점 정도에서 또 한 번 쉬었다. 그곳까지 오는 도중, 올림픽 대로와 동일한 지면 위에 자전거 도로가 평행으로 나있는 지점이 있었는데, 맞은 편에서부터 다가와 스치듯 지나간 차 속에 아는 사람이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서울 인구가 천만이라는데, 오다가다 아는 사람과 마주치는 일이 이따금씩 있는 걸 보면, 확률을 초월한 인연의 끈 같은 게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잠시 다리를 쉬어주고 또 페달을 밟았다. 동호대교, 성수대교, 영동대교를 지나는 지역의 자전거 도로는 특히 매력적이다. 강둑 높은 곳의 절벽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물을 따라 바람을 가르고 달리는 재미가 독특해서 그런 것 같다. 나는 높은 데서 하강하는 자전거 길에서는 두 팔을 쫙 벌리고 바람에 온 몸을 내맡긴 채 질주하는 걸 좋아한다, 마치 'City of Angel'이란 영화의 종반부에서 멕 라이언이 그랬던 것처럼. 멕 라이언 흉내를 내서 그렇게 내려가고 있노라면, 꼭 영화의 그 다음 장면이 떠올라 정신을 추스리고 자전거 핸들을 다시 꽉 잡곤 한다. 그 다음 장면에서 멕 라이언은 신에게 온몸을 내맡긴 채, 자전거 핸들도 안 잡고는 언덕길을 내려가다가 트럭과 부딛혀 황천길로 떠났다. 나의 '내맡김'이 엑스터시에 미치지 못하는 연유는, 내가 몸담고 있는 이 현상계를 아직은 떠날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동대교 부근부터는 엔진 출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미 세 시간 넘도록 열나게 달려왔기 때문이다. 어느덧 햇님은 기울어서 서산에 걸려있고, 무리한 자전거는 삐거덕 소리를 간단없이 내뱉는데, 이날따라 점심 때 힘내보겠다고 사먹은 2,500원 짜리 한솥 도시락 '제육김치볶음' 속에 제육이 거의 멸종해 있었던 탓인지, 몸의 연료가 다 고갈된 것 같았다. 잠실 운동장 앞에서 양재천 길로 접어들어선 뒤, 거의 한 시간이나 걸려서 과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몸은 힘들어도 자연이 주신 선물은 여전히 아름답다. 서산으로 넘어가는 석양의 마지막 빛 한 줄기를 바라보고, 푸르스름해진 창공 위에 걸려 있는 늑대의 눈썹 같은 달님 아래에서 자그마한 내 몸뚱아리 하나 끌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날 닮아 자그마한 하천의 물흐르는 소리는 상냥하기만 하다. 내가 그 물소리에 감사하면, 달님에게 감사하면, 그걸 다 주님께서 알아들으시리라는 걸 믿는다.

올 가을에도 이렇게 반나절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곧 겨울이 와서 날이 더 쌀쌀해지고 강바람이 차가워지면, 그 강변 길로 또 자전거를 몰고 나가기는 어려울지 모르겠다. 목동의 안양천변에 유채꽃밭을 만들고 있는 걸 보았으니, 내년 봄이 오면 꼭 한 번 더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