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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시사 프로에서 IMF 경제위기 당시 생활고로 자식을 영아원에 맡겨야
했던 부모의 이야기가 나왔다. 촬영기사는 엄마와 네 살 짜리 아이가
헤어지는 장면을 냉정하게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냈다. 일곱 살
되면 데리러 오겠다며 흐느끼는 엄마의 말에 아이는 뜻도 모른 채 알았다
대답하고 엄마에게 울지 말라 하더니, 엄마가 떠난 지 몇 시간 후에야 사라진 엄마를 찾으며 우는
것이었다.
며칠 뒤 영아원을 다시 찾은 방송팀에게 네 살 짜리 아이는 집에 가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처참한 장면들이었다. 세월이 흐른 뒤 방송팀이 그
아이를 찾아나서 보니, 다행히도 부모와 헤어진지 얼마 뒤에 바로 부모가
아이를 찾아갔다고 하였다. 이제는 훌쩍 커버린 그 아이를 수소문 끝에
찾아냈는데, 아이는 네 살 때의 처참했던 상황에 대해선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단지, 그럴 수밖에 없었던 부모들 가슴 속에만 그
사건이 평생 씻을 수 없는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 아이가 그 때 일을
잊을 수 있던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작년에 내가 만난
한 청년은 어려서 미국으로 입양되어 친부모와 이별했던 한국계
미국인인데, 어엿한 성인이 되어 친부모를 찾으러 한국을 방문한 참이었다.
당당한 체구에 번듯한 외양과, 과묵하면서도 따뜻한 성품을 가진
지적인 그 청년이 나는 썩 마음에 들었기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데리고 다니며 서울 구경도 시켜주고 밥도 사주었다. 헌데 그는 한국어를 전혀 모를
뿐만 아니라, 한국말을 조금도 알아듣지 못해서, 나는 처음에는 그가 갓난
아기였을 때 입양된 줄로만 알았는데, 실은 일곱 살 때 미국으로
입양 되었다는 말을 듣고 많이 놀랐다. 나와 함께 저자 거리를 돌아
다니며 좌판에서 파는
군것질 거리 음식들을 사먹어 보던 그는, 그것들을 먹으니 어릴 때가
기억난다며 번데기 냄새를 식별해냈다. 어릴 때 동네에서 어떻게 놀았었는지도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런데 일곱 살이었다면 기본적인 언어의 틀이
잡히는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어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또, 그의 팔뚝에는 십수년 이상은 된 것으로 보이는 오래
된 흉터들이
있었는데, 내 눈에는 그것들이 유아기에 학대를 받은 흔적으로 보였다.
유아기를 어른의 학대를 받으며 보내다가, 일곱 살에 부모와 강제로
떨어져서 머나먼 이국의 파란 눈을 가진 새부모를 찾아 가야만 했던
어린 그의 마음 속에는 얼마나 깊은 상처가 새겨졌을까? 그 상처가
얼마나 깊었기에 일곱 살 먹은 아이가 모국어를 완전히 망각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렇게라도 메모리를 지워버리지 않고는 일곱 살 짜리가
그 현실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으리라.
우여곡절 끝에 그 청년은
어려서 헤어졌던 여동생과 거의 이십 년만에 극적인 해후를 하게 되었고, 나는 그들을
내 차에 태우고 서울 시내 관광을 함께 나섰다. 하루 종일 구경하며
다니느라 다른 일행은 잠에 곯아떨어져 있을 때,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에는 나와 그 오누이만이 깨어있었다. 여동생은 대학생이지만 이십
년만에 만난 오빠가 하는 영어를 완전히 알아듣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고, 둘은
간신히 떠듬떠듬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대뜸 끼어들어 죄다 알아듣도록
통역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냥 조용히 운전만 했다. 둘이서
조금씩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터득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둘의 친부모는
오래 전에 갈라섰고, 여동생도 계모와 함께 살았다고 했다. 그 여동생에게
오빠가 아주 느린 영어로 물어보는 것이었다: "Did your parents
treat you well?" [너희 부모께서 너를 잘 대해주셨니?] 동생은
얼른 그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다. 동생과 떨어져서 흘러보낸 이십 년을 걱정스러운
그 한 마디의 질문으로 알아내보고 싶은 오빠의 심정이 나에게도 전해져 왔다.
앞을 보고 운전만 하던 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해외 입양과 같은
경험은 어린 아이가 간직하고 살 수 있을 만한 기억이
아니었다.
나의 첫째 딸은 매우 소극적인 성격을 지녔고 사회
생활에서 자신감이 약한 편이라 부모로서 좀 걱정을 하게 된다.
수 년 동안 나는 그런 딸의 소심성의 원인이 나에게 있을 것이라는 자책감을
안고 살았었다. 그 애가 한, 두 살 때엔 학교 다니던 아내 대신에 박사
논문 쓰느라 여유가 있던 내가 낮 동안 아이를 봤었는데, 그때 밥 멕이며
야단 쳤던 기억도 나고, 그 후에 좀 자라고 나서도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야단치고 꾸중했던 것들이 기억 났다. 그런 기억들이 하도 후회스러워
둘째에게는 웬만해선 야단을 치지 않는다. 못된 애비 탓에 아이가 소심한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큰 자책이었다. 헌데 공부를
하다보니, 아동의 성격 형성에 주된 영향을 끼치는 것이 후천적인
요인들보다는 선천적인 - 유전자 차원의 - 요인이 훨씬 크다는 과학자들의
주장에 점점 동의하게 되었고,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니 나의 두 딸들도
부모의 영향을 받기 이전에 이미 확연하게 구분지어지는 나름대로의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낼 수 있게 되었다. 첫째는
태어나서부터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데 반해, 둘째는 엄마 젖 빨
때부터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듯한 활동성을 보였었다. 첫째는 내
품 속으로 파고 들며 안겼었던 데 반해, 둘째는 도무지 팔에 안고 있기가
힘들 정도로 바깥으로 뛰쳐나가려는 듯 바둥댔었다. 그래서 이젠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한다: 병신같이 너무 자책마라, 내 힘이 미치지 않고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아이들 각각에게 주어진 천성이 있는 것 아니겠냐. 물론, 아가였던 큰
애를 야단치던 아빠의 행동이 정당화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를
조금은 더 용서해줄 수 있게 되었다. 첫째가 나에게 야단 맞던 기억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지 않음이 큰 다행이다.
최근에 읽은
달라이 라마의 글에서, 아이는 부모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주어진다는
표현을 볼 수 있었다. 그게 맞는 말인 것 같다. 자식이 부모에게 무거운
부양 의무를 부과하기 위하여 주어진 존재가 아니라, 부모의 삶에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 위하여 주어진 존재라는 것. 그것을 의식할 때 부모는
좀더 아이와 여유롭고 즐거운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식에게 무엇이든 최고로 해주지 못하면 부모로서의 자신을 책망하게
되거나 자식의 미래를 백 퍼센트 책임지고 보장해주려는 병적인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부모라면, 은총의 선물로서 주어진 아이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 무엇일지 다시 한 번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가
아침에 깨자마자 나에게 물었다: "아빠, 봄이 되려면 이제 일곱
밤만 자면 되지?"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잠시 생각해보니, 며칠 전엔가
아이가 몇 밤이나 자면 봄이 오냐고 묻기에 그냥 "열 밤만 자면
돼"라고 대답해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이는 그 날부터 하룻 밤이
지날 때마다 봄이 올 날을 손꼽아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그래, 이제 일곱 밤만 자면 봄이 온다'고 대답해주었다.
그리고는, 아이가 유치원에 다녀온 뒤에 이 이야기를 들었다: 둘째가
유치원에 가서 아이들에게 이제 일곱 밤만 자면 봄이 온다는 말을 전해주자,
그 소식을 들은 아이들이 모두 기뻐했다고 한다.
봄이 되면
할 일들에 가슴이 부풀어서 매일 매일을 손꼽아 헤아리며 기다리는 둘째의
행복한 유년기. 그런 즐거운 기억은 둘째가 더 자란 후에도 남아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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