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 (2005/4/2)
 

반가운 길벗님을 만나 밤늦도록 이야기 꽃을 피우던 중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비록 사회과학도로서 훈련을 받았던 탓에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숭상하는 가치관을 오래도록 지니고 살아왔지만, 신앙을 가진 이후로는 점점 더 비판이라는 것을 싫어하게 되고, 비판의 가치에 대해서 회의하게 되었노라고. 내가 사회적 현상에 대한 비판정신을 여전히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는 있지만, 사람에 대한 비판은 결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유용한 것이 못된다는 의견을 굳히게 된 것은 누구도 타인을 심판할 수 없다는 영적인 스승들의 가르침을 내면화한 것에 기인한다. 헌데, 길벗님과 헤어지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 타인을 심판하지 않고, 타인에 대한 비판을 이제는 더 이상 하지 않고 살게 되었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드러내놓고 남을 욕하거나 비판하는 일은 별로 하지 않을런지 몰라도,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날카로운 비판의 촉수를 유지한 채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시적에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을 아주 좋아했었지 않은가.

따져보니, 여전히 내가 (속으로) 비판하고 있는 '타인들'은 대단히 많다. 권위의식에 찌들어 목이 석고처럼 뻣뻣한 위정자들,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콧방귀도 안 뀌는 사회경제적 상류층, 개인적 책임의식은 결여되어 있으면서 관행과 모양새만 따지는 관료주의의 노예들, 신을 팔아먹으며 영리를 추구하는 종교 영업인들, 실력은 없으면서 뻥만 치는 대학 교수들, 이성의 마비가 목적인양 '우리 것'만 목청껏 외쳐대는 국수주의자들, 배타적 아집에 사로잡혀 타인에 대한 심판을 함부로 일삼는 종교 근본주의자, 성경무오류설 신봉자와 광신도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믿으며 '인간'의 가치를 무시하는 샤일록의 후예들, 들쥐떼마냥 '명품'과 유행을 좇아 우르르 몰려다니는 '골빈당들,' 소비를 위하여 태어난 듯 쇼핑에 삶의 커다란 부분을 봉헌하는 천민자본주의 추종자들, 텔레비전의 연예계 가십 보도를 가장 믿을 만한 행동의 준거로 삼는 무뇌증후군자들, 내자식만은 최고로 키우겠다며 오히려 제 자식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망쳐버리는 무식한 부모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어떤 변화도 거부하며 불평만 많은 학교 선생들, 주지육림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며 여자를 고깃덩이로만 보는 중년남자들,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해주지 못하는 호적제를 수호하기 위해 뭉친 유림, 민족의 진정으로 위대한 유산인 한글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한글전용 반대론자들, 적반하장을 국가적 차원에서 실천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일본의 보수우익 세력, 대기업과 군수산업의 이윤을 극대화 하기 위해 국민과 세계를 기만하는 미국의 극보수정치가들,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인명살상과 인간성 파괴를 개의치 않는 전세계의 전쟁 옹호론자들, 당리당략적 차원에서 정의의 사도인 그레이트 마징가의 파괴를 명령한 정치집단과 은하계 식민지화를 위하여 지구를 침략하고 독수리 5형제를 괴롭히는 외계인 악당들...

아직도 더 있다, 내가 마음 속으로 신랄하게 비판해온 '타인'들은. 남으로부터 전해 들은 얘기를 유일한 근거로 어떤 개인을 평가해버리는 이들, 가방끈 좀 길다고 그 끈 좀 짧은 사람들 무시하는 이들, 자신의 시각과 믿음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들... 아이구, 한도 없구나.

물론 내가 - 마음속으로나마 - 어떤 개인을 비판해온 것이라기 보다는 대체로 특정 '집단'이나 '부류'의 드러난 성향을 비판해온 것이긴 하지만, 나의 그러한 비판 정신 속에마저도 부정적인 감정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음을 나는 애써 외면해왔던 것이다. 증오, 적개심, 경멸, 냉소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

비판이 심판이 아니라 이성적인 지적(가리킴)이기 위해서는, 비판자인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의 찌꺼기들을 말끔히 청소해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겠다. 이성적인 지적이란, 월쉬 선생에게 신께서 종종 사용하셨다는 탁월한 비유를 인용하자면, 부산으로 가겠다는 사람이 부산으로 가지 않고 광주로 가고 있을 때, 그가 가는 길이 부산으로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가리켜 주는 것이 되겠다. 나의 비판 정신 속에는 그러한 '가리킴'의 자비심이 들어 있는가? 오직 자비심으로써만, 도우려는 마음으로써만 타인의 행위를 비판할 일이다. 그것도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나의 제자이며 학교 선생님인 분으로부터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전교생이 이, 삼십 명에 불과한 시골 분교에서 드럼통에 직접 고구마를 구워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사랑의 선생님인 그는, 그러나 나의 안목으로는 예리한 사회적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 선생님은, 이즈음 아이들과 들꽃 박물관을 만들기 위한 일에 한창이라고 했다. 또 날 좋은 밤에는 아이들과 함께 밤하늘의 별자리 관찰도 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들어 한참 '이성'적인 나의 역량에만 집중해서 공부하고 있던 나에게 그의 이런 이야기들은 들꽃처럼 상큼하게 들렸다. 공부를 핑계로 이런 저런 세상사에 비판적인 시각을 줄창 들이대고 있던 나에게 그의 이런 이야기들은 별자리처럼 깨끗하게 들렸다. 비판하기 보다는 꿈을 만들어가는 삶이 아름답다. 아~, 내가 또 과도하게 한쪽으로만 편중된 생활을 하고 있었구나. 내일은 정말로 아이들 데리고 봄바람 맡으러 나들이나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