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대화

딸과의 대화(2) (2005/11/26)

1.

첫째 시시가 대화중에 '통찰력'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였다. 평소에 제 또래들에 비해서 일반 상식이 매우 부족한 아이가 그런 어려운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뜻밖이어서 그 의미를 아느냐고 물었다. '당연하지'라고 장담한 시시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렇게 설명했다.

"스타워즈에서 오비원 케노비가 루크한테, '네게는 여동생이 있다'고 말해줬을 때, 루크가 금세 그 여동생은 레이아라고 알아차린 게 통찰력이잖아!"

어려운 개념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 기특하다는 생각에, 시시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렇게 말해줬다.

"너는 통찰력이 있는 아이야."

"그래? (으쓱해 하면서) 근데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요즘 "어떻게 알아?"라는 구체적 질문이 가진 위력을 터득하고 있는지, 툭하면 그 무기를 애비에게 써먹는다.

"그냥 알아, 임마."

시시는 '통찰력'이라는 개념에 대해 더 파들어가고 싶어했다.

"통찰력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지금 뭐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어?"

"그런 건 통찰력이 아니라 초능력이라고 하지."

"통찰력이나 초능력은 어떻게 생겨?"

초능력 습득 과정에 관해 아는 바가 없는 나는 슬그머니 소재를 통찰력에 제한하며 답해줬다.

"책 많이 읽고 공부 많이 하면 통찰력이 더 생겨."

"어떻게 공부를 많이 한다고 통찰력이 생겨? 책에서 그런 걸 가르쳐주나? 그런 건 도술 같은 걸 배워야 생기는 거 아니야?"

흠, 이 녀석이 통찰력과 같은 능력은 학교 공부 따위와 유사 범주가 아니라는 걸 이미 눈치 채고 있군.

"책으로도 통찰력이 커질 수 있고, 다른 걸루도 커질 수 있대."

시시는 내가 고의로 누락시킨 소재를 다시 들이밀었다.

"초능력이 책 읽으면 생겨?"

"그건 아니고... 초능력 같은 건 하느님이 주시는 능력이야. 하느님이 주시면 받는 거구, 안 주시면 없는 거지, 뭐."

나의 응답에 만족스러워 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아이가 감기 기운도 있고 하여 빨리 재울 요량으로 결론을 내려줬다.

"너는 통찰력이 많은 아이야. 그러니까 책 읽고 공부 많이 하면 커서 지혜로운 사람이 될 거야."

"그래?"

논리보다도 자긍심 고양이 더 유익하지 않겠나.

2.

헌데 아이는 잠자려 하지 않고 애비를 더 붙잡는 것이었다.

"근데 아빠, 난 불교는 싫고 기독교가 더 좋아."

"너 교회 아줌마들 싫다며? 교회도 싫댔잖아."

"응, 교회는 싫은데 기독교는 좋아."

나는 놀랐다. 성인들도 교회를 기독교와 동일시하고 있건만. 또, 내가 종교학적 시각을 아이에게 일언반구 비친 적도 없건만, 어린 아이가 이러한 세밀한 분류를 하고 있었다니... 물론 나의 사고에는 대충 이러한 위계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신 → 예수 → 성경 → 기독교 → 교회. 이러한 위계의 선 위에서 볼 때, 나의 신앙적 충성도는 오른쪽으로 갈수록 그 강도가 급격하게 약해진다. 이러한 정신구조가 유전적으로 계승될 리도 없을 터, 시시는 어쩌다 만 아홉 살에 이런 생각을 품게 된 것일까?

"난 예수님이 좋은 거 같애, 부처님은 별루거든, 절에 있는 부처님두 이상하구."

아하, 불상의 생김새가 맘에 안 들었구나.

"절에 있는 그 부처님을 사람들이 믿는 건 아니고, 부처님 상은 사람들이 더 열심히 믿는 걸 도와주려고 만들어 놓은 거야."

"그래? 불교는 부처님 믿는 게 아니란 말야? 기독교가 예수님 믿는 것처럼?"

"불교나 기독교나 다 같은 하느님 믿는 거야, 근데 서로 얘기하는 게 다를 뿐이고. 부처님도, 예수님도 다 사람이지."

물론, 과도하게 단순화된 논리와 개인적인 주관에 불과한 진술; 아홉 살 짜리에게 어찌 달래 말해줄 방도가 있겠나?

"정말? 부처님도 하느님 같은 거 아니야?"

"젤루 높은 게 하느님이고,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잘 믿을 수 있을지 가르쳐주는 사람들이야."

"하느님은 어떻게 생겼어?"

"아빠가 전에도 말해줬잖아,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구."

옆의 침대에 누워서 입다물고 모른 척 듣고만 있던 둘째 나나가 이 순간에 끼어들었다, 매우 냉소적인 웃음을 입가에 띤 채.

"보이지도 않는데 하느님이 어디 있어?"

"하느님은 어디에나 있어."

나나는 비웃는 듯이 되물었다.

"어디에나? 그럼 바로 요기에도 있다구? 우하하하!!"

보통은 매우 침착하고 냉정한 깍쟁이인 나나는, 웃을 때엔 껄껄거리며 호탕해지는 묘한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 요기에도 있다, 요놈아."

"어디? 어디? 난 안보이는데?"

요놈을 그냥...

"빠빠가 전에 4차원 얘기 해줬지? 우리 눈엔 안보여도 다른 세상이 있다구 말야. 하느님도 안보이지만 있는 거야."

여전히 비웃는 나나, 그러나 조금은 갸우뚱거리며 애비의 주장을 수용해볼까 망설이는 듯이 보였다.

3.

공연히 시작한 고담준론으로 아이들 취침시간만 늦어졌건만, 이 녀석들이 이날따라 애비를 놓아줄 태세가 아니었다. 이번엔 시시가 또 엥겼다.

"아빠, 우리가 크리스마스 때 무슨 선물을 받고 싶어하는지 싼타 할아버지는 어떻게 알아?"

"싼타 할아버지는 우리가 있는 곳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살기 때문에 그런 걸 다 볼 수가 있대."

이제는 나나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한다.

"차원이 뭐야?"

골치 아파지기 시작이군...

"우리는 여기에 살고 있잖아, 근데 해리 포터가 사는 학교는 우리가 사는 데랑 좀 다르지? 그리고 유니콘이나 요정 같은 것들도 우리 사는 데 안 살잖아. 그런 것들이 사는 다른 데 같은 걸 차원이라고 그래."

나나는 이해하기 어려워 했다.

"왜 우리한테는 다른 차원이 안 보여? 싼타 할아버지는 우리가 보이는데 우리는 싼타가 안 보여?"

"싼타 할아버지는 우리보다 더 높은 차원에 사니까 우리가 그냥 보이나봐. 우리는 3차원에 사는데, 싼타는 그보다 더 높은 4차원 같은 데 살 거야. 개미가 우리를 못 봐도 우리는 개미를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야."

"그럼 요정도 천사도 유니콘도 다 4차원에 있어?"

"그런가봐."

"4차원은 천국 같은 데야?"

"빠빠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 비슷한가 보지."

나나의 질문이 멈추질 않았다.

"천국은 좋아?"

"좋대."

"그럼 나 거기 가보고 싶어!"

헉, 이게 웬 말씀!

"천국엔 그냥 갈 수 없고, 여기서 엄마 아빠랑 행복하게 다~[특히 강조] 살고난 다음에 갈 수 있어. 착하고 행복하게 잘 살지 않고 나쁜 일 한 사람들은 죽어서도 천국가는 길을 잘 못찾아서 막 헤맨대."

"그래? 그럼 우리 나중에 다 천국에서 만나면 되겠다."

언어 분석의 원리에 입각하여 대학 강의실에서 철학적 논증을 일삼고 사는 내가 이딴 식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해 딸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쩔쩔매기 일쑤다. 나도 모르는 것들을 가지고 어린 아이들을 납득시키려니... 얘들이 몇 살이 될 때까지 이렇게 사기치며 대꾸를 해줘야 하나... 언젠간 다 뽀록날 것.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시시가 말했다.

"아빠, 어젯 밤에 꿈에서 귀신 나왔어. 까만 머리가 기다랗고, 하아얀 옷을 입은."

고담준론을 통해 상상의 세계에 대한 지평이나마 좀 넓혀주려 했건만, 웬 처녀귀신 악몽? 요즘 브루노 베텔하임이 쓴, 옛 이야기가 아동의 무의식의 올바른 발현에 큰 도움을 준다는 책을 탐독하며, 아동기의 상상력의 중대함을 재삼 확인하고 있는 중인데, 아이들의 내면 세계는 역시 통 종잡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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