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심 (2005/7/8)
 

1. 아침의 평화

나는 자전거 타기를 사랑한다. 그래서 매일 아침 자전거로 출근하는 길은 행복하다. 자동차 매연과 인파로 어지러운 저자거리를 자전거 타고 다니는 것은 즐겁지 않다. 고마우신 나의 님께서는 나의 출근 길에 호젓한 도로와 고요한 산길을 베풀어주셨다. 그 길에는 나무와 풀과 들꽃과 논밭과 과수원이 있다. 그 길을 바람을 가르며 지나는 아침은 행복하다. 더 무엇을 갖고, 하고, 이루고 싶은 욕심 같은 것 별로 없다. 아침에 그길을 자전거로 달릴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얼마 전 출근 길에 논두렁 옆을 달릴 때, 논의 거울같은 물위로 먼 산과 파란 하늘이 비쳤다. 풀 내음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콧잔등을 어루만진다. 물위에 비친 산과 하늘의 맑은 모습. 그 모습을 내가 당신과 나눌 수만 있다면. 아침의 맑은 공기를 당신과 나눌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 순간의 모습과 향기가 가르쳐 주는 무념무상, 그냥 이대로 있음의 가르침을 오후의 나 자신에게 미리 가져다줄 수만 있다면...


2. 대낮의 분노

번화한 서울 시내 전철역의 출구 계단을 오르다 걸인을 보았다. 비만한 몸에 더러운 옷차림을 한 중년의 여자 걸인은 그 오르내리는 인파의 발밑에서 내 둘째 딸 나이 쯤 되어 보이는 계집애를 품안에 꼭 껴안고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의 동냥함에는 백원 짜리와 십원 짜리 동전들만 여러 개 뒹굴고 있었다. 그녀에게 증오심이 뻗쳤다. 전철 역 계단이 혐오스럽고, 나 자신에게도 증오가 일어났다. 그녀 앞에서 뚝 걸음을 멈춰섰다. 내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던 인파의 물결이 갑자기 멈춰 선 내 등에 밀려 부딛쳤다. 걸인에게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줄 타이밍을 놓치고 지나쳤을 경우, 되돌아가서 주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와 더러운 계단이 미워서 그녀 앞에 멈춰섰다.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동냥함에 놓았다. 그녀가 조금 얼굴을 들어 무어라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같았다. 그녀 속에서 예수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증오하고만 있을 뿐이다. 그 아이의 더럽고 처참한 모습 때문에. 모녀를 뒤로 하고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더 이상 아침처럼 평화롭지 못하였다.

걸인 모녀의 개인적 사정, 동냥 노하우, 그들을 그렇게 거리로 내몬 현실, 이런 것들을 내가 구체적으로 알 턱이 없다. 그 어린 것을 그런 곳에서 그런 모습으로 껴안고 앉아 있다는 그 자체에 분노가 치밀었을 뿐이다. 아이를 동원하여 행인의 동정심을 극대화함으로써 큰 수입을 올릴 수 있었을까? 아니면 오로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만큼 절박했을까?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다. 그저 세상과 어른의 잔인함에 치가 떨릴 뿐이다 - 나도 그 '어른'들 중 하나이고. 그래서 할 수없이 돈 몇 푼이라도 주고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위행위다. 그냥 이대로 있음의 가르침은 오전 몇 시간을 버티지 못한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2: 애너킨 스카이워커의 연인인 파드메가 제다이의 계율에 대하여 질문한다, 제다이도 사랑을 할 수 있느냐고. 애너킨의 대답은: "Attachment is forbidden." 의역하자면, '제다이 기사들은 세상 그 무엇에도 정붙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정도 되겠다. 그래, 맞다, 증오하고 슬퍼하는 것도 다 정을 붙여서 그러는 것.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런 세상에 정을 붙이고 사는 한, 슬픔과 분노로부터 초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 제다이 기사들처럼 은하계 전체를 위한 위대한 일을 감당해내기 위해서는 세상에 사사로운 정을 붙이지 말아야 하겠지만. 사사로운 동정심을 초월하는 세상의 구세주들이 존경스럽기는 하여도, 세상 속의 나에게 '초월'은 받을 수 없는 선물인 것만 같다.


3. 분별심

그날 오후, 다시 지하철을 타보니 좌석이 많이 비어 있었다. 내가 앉은 좌석의 좌우 양쪽이 모두 비어 있었다. 책이나 읽으며 갈까 하다 조금 피곤하여 눈을 감고 쉬기로 했다. 다음 역에서 열차가 서니 문이 열리면서 꽤 많은 사람들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내 양 옆 좌석들에도 사람들이 앉았다. 눈을 감은 채로 짐작을 해보았다. 내 옆에는 어떤 사람이 앉았을까? 눈을 뜨고 있었다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을 것이다. 할머니, 아저씨, 아줌마, 아가씨, 아니면 고등학생 등등. 하지만 그것 - 겉모습 - 이 내가 알게 되는 전부였을 것이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어떤 사람인지 알아맞춰 보려 했다. 청각과 후각은 별 도움이 못 됐다. 촉각으로는 알 수 있을까? 옆에 앉은 사람들의 체온밖에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이렇게도 오리무중일 수가. 평소에는 우락부락한 아저씨가 옆에 앉았을 때와 가녀린 아가씨가 옆에 앉았을 때의 촉감이 매우 다르다고 느꼈었는데, 그 느낌마저도 시각의 장난질에 의해 속아넘어 갔던 것에 불과했구나.

오감을 버리고 육감에 의존해 봤다. 역시 모르겠다 - 아무래도 제다이 같은 초능력자가 될 자질은 없나 보다.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들이 사람이라는 것뿐(이것도 실은 경험을 통한 짐작에 근거한 앎이지만 - 왜냐하면 아직까지 한 번도 짐승이나 귀신이 지하철에서 내 옆 자리에 앉았던 경험은 없기 때문에).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아줌마인지, 아저씨인지, 아가씨인지, 소년인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들은 그저 사람일 뿐이었다.

나는 그들의 사회·생물학적 '정체'가 무엇인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앉아 있게 될 것인가? 아마도 그러했을 것 같다. 만약 내 옆에 앉은 이가 노숙자였다면 나는 그의 '더러움'이 내게 묻혀지지 않도록 몸을 움츠렸을지도 모른다. 그가 몸이 불편한 이로 보였다면 내 자세를 좀 조정해서 그에게 더 많은 공간을 제공해주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어여쁜 아가씨였다면 성희롱 혐의 받지 않으려는 자격지심으로 애써 거리를 더 두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조폭이었다면 얻어맞지 않으려고 옷깃을 여미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들의 '정체'를 시각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 알았더라면 나의 그들에 대한 내면, 외면의 반응이 이렇듯 차별적이고도 다양했을 것 같다. 그러나 몸의 눈을 닫아버린 나는 그들의 '정체'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으므로 그냥 그대로 앉아 있었다. 차별심 없이. 평상심으로. 그들과 나 자신을 똑같이 존중하며.

아까, 내 눈 앞에 한 순간 펼쳐져 있는 현상의 모습만으로도 나는 분노했었다. 물론 사진 한 컷이 많은 스토리를 담고 있듯이, 전철 계단에서 어린 여자애를 안고 구걸하는 걸인의 모습을 한 순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많은 판단을 해버린다. 그리고 분노하고 증오한다. 세상에 비치는 그들의 모습으로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지 말고 아예 눈을 감고 사는 편이 더 온전한 앎에 근접하는 방법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각으로 파악한 목전의 현상에 대한 나의 분노가 완전히 부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격한 감정적 반응은 내 자아를 몸에 심하게 묶어버려, 그 몸을 뛰어넘을 수 있는,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상상을 아예 폐기해버리는 것 같다. 고통스러운 현실의 모습(현상)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자아를 축소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 같다. 기다림이 필요한 듯 싶다. 나는 여전히 성급하다.


4. 관용

며칠 전 일간지의 독자 코너에서, 버스의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좌석에서 통로 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거나 자신 옆 좌석에 짐을 놓아두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질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글쓴 이는 이런 버스 승객들에 대한 '짜증스러움,' '부끄러움,' '안타까움' 등을 호소하고, 입장 바꿔 생각하여 남을 배려하는 정신을 가져야 할 것을 주장하며, 자신은 이 사회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의 씨앗을 뿌리고 싶다는 말 등을 남겼다.

얼핏 들으면 좋은 말 같지만, '버스 속의 좌석 문화'를 수십 년 겪어온 수도권 시민으로서는 그렇게 간단히 넘길 수만은 없는 말이다. 이 글쓴 이의 가장 기본적인 오류는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자신과 그렇지 못한 타인들을 갈라놓은 데 있다고 본다. 그러한 차별심으로 버스 안을 보았을 때, 당연히 마음에 안 드는 모습들이 수두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좌석에 앉는 행동 양식을 어떻게 일률적인 기준으로 평가하고 그 기준을 벗어난 이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비양심적인 인간들이라 심판해버릴 수가 있는가. 먼저 탄 사람이 반드시 창가 좌석에 앉아야 한다는 불문율적인 에티켓이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면, 나는 오히려 그런 경직성에 숨막혀 괴로워 할 것 같다. 그런 에티켓은 집단적 순응도가 아주 높은 일본 사회에서나 찾으면 어울릴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그런 것이 매우 갑갑하게 느껴진다.

어떤 사람들은 왜 버스에서 통로 쪽 좌석에 앉는 것일까? 인간 행동 양식에 대한 해석은 결코 간단할 수가 없다. 배려심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오직 전자일 것이라고만 보는 시각은 편협하고 단정적이다. 다리가 남보다 길어서 차바퀴가 돌출한 좌석에 앉는 것이 타인들 보다 아주 괴로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창쪽에서 분출되는 에어컨 바람을 쐬면 호흡기 계통에 거부 반응이 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몇 정류장만 더 가면 내려야 하기 때문에 창쪽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올 경우, 옆 좌석 사람에게 폐를 끼치기 싫은 배려심 깊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초행 길이라 언제 튀어나가 내려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통로에 앉아 있어야만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아니면,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창쪽 좌석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감이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실제로 창가에 앉아 가다가 사고를 당한 경험으로 창가 좌석에 앉는 것이 극심한 심리적 부담을 주는 사람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또, 빈 옆 좌석에 가방을 놓아둔 사람이 있으면, 그곳에 앉겠다는 제스쳐만 보여도, 깡패가 아닌 이상(아니, 깡패라도) 누구나가 다 가방을 치워준다. 그런 사소한 커뮤니케이션을 감행하는 것조차 귀찮다면, 그것은 치워달라는 표현 조차도 하기가 싫은 그 사람의 문제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의 동기와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관용의 마음이 필요하다. 버스 안 승객들의 앉아 있는 모습이 일사분란하게 단선적인 에티켓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정해져야만 한다고 보는 그 마음이 더 문제다. 조금 헝클어져 있고, 문제가 있을 때, 조금씩 의사소통하며 해결해나가면 되지 않는가.

나는 단정과 심판과 평가가 싫다. 그것들 다 분별심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내가 그것들을 싫어하는만큼 나에게도 그런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뭐 묻은 놈이 뭐 묻은 개 나무라는 법 - 바로 나 자신 얘기다. 그건 그렇다 하여도, 어찌됐든, 성급한 판단의 오류가 일상의 도처에 퍼져있으니 우리 모두 그러지 않도록 성찰해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찌됐든, 나는 내일 아침에도 자전거를 타고 무념무상의 출근길을 즐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