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살 (200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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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 Hoon Han
고대해오던
바대로 드디어 몸져 누워봤다 - 별 것 아닌 몸살감기로. 덕분에 오랜만에
잠옷 차림으로 왼종일 구들장 뭉개며 딩굴거려봤다. 나이 값 못
하고 몸뚱이를 너무 굴렸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한 일주일 동안
연속으로 몸을 혹사시켰다, 앓아 누워보려고 환장한 듯이.
관악산
속성 등정이 그 시발점이었다(방명록에 써놓은 대로). 관악산 정상에
오른 그 다음 날 또 다시 관악산을 빠른 속도로 넘어서 출근을
했다(차로 가면 20분, 자전거로는 30분, 산을 넘으면 세 시간은 걸리는
출근 길). 지난 여름 동안 바빠서 운동을 제대로 못한 것을 벌충할 욕심에,
그래서 증가한 배 둘레의 지방질을 단기간에 제거하려는 욕심에, 그
다음 날은 자전거를 끌고 나섰다. 반 나절만 일하고 오후 내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과천에서 잠실까지 양재천을 따라 새로 난 자전거
전용 도로를 질주해서, 한강변으로 여의도와 성수대교를 지난 후, 안양천을
끼고 목동, 광명시, 안양을 거쳐 과천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강남-경기도
일원을 한 바퀴 순환하는 데 네 시간이 넘게 소요되었다. 다음
날은 차분히 틀어박혀 일하려 했으나, 아침에 자전거 타고 출근하다
보니 하늘이 참으로 파랬고, 어제 달렸던 강변의 시원한 길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에라, 내가 앞으로 또 언제 이렇게 운동해보겠냐 하는 심산으로
그날 오후에 또 다시 자전거를 몰고 나가 어제의 그 순환 코스를 역으로
한 바퀴 돌았다. 서산으로 해가 넘어간 뒤에야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 날은 페달 밟기가 좀 힘겹게 느껴졌다. 이렇게 낮에 놀아제꼈으니
늦은 밤까지 밀린 일 하고 나서, 다음 날 학교에 나가 밤까지 세 차례
열강을 마쳤다.
그 다음 날은 서울 북부의 머나먼 거래처에 일봐주러
갔다가, 일을 마친 후에 저녁 때의 약속 시간까지 짬이 나서 평화시장의
고서점가를 잠시 알짱거렸지만 여전히 시간이 남기에, 유명해진 청계천
변을 따라 한 시간 쯤 걸었다. 저녁 때 만난 친구 녀석이 그날따라
술집을 3차까지 끌고가는 판에 밤 한 시도 넘어서 귀가했다. 이 날은
하루 종일 공부한 거라곤 반야심경 몇 줄이 전부. 그런데 술도 많이
퍼마셨으니 다음 날엔 좀 쉬며 차분히 보냈어야 하건만, 둘째 나나의
유치원 운동회 날이 아닌가. 요즘 들어 나나가 한창 맛들인 네발 자전거를 뒤에서
잡고 밀어주며(이 자체만으로 땀빼는 운동) 운동회 장소까지 가서,
사진 찍고 캠코더 찍어주고 - 나나가 아이들 대표로 뽑혀서 무대에 나가
무용 동작 시범을 보였기 때문에 -,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프로그램에 아이와 함께 참여해서 뛰고 땀빼다 잠시 잔디밭에 앉아 쉬다보니
몸이 으슬으슬 추운 게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어쨌거나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애엄마와 함께 아이를 위하여 열나게 뛰어준 후에는, 파장한
운동회의 주최측 짐꾸러미를 서너 번 지고날라다 주고, 다시금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 밀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일요일인 다음
날, 하루 종일 몸져 누워있을 수 있었다.
바랬던 바대로 이루어진
일이라 하느님께 감사하며 누워 있었다. 제가 바래는 건 이렇게 다 들어주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주님. 하루를 꼬박 앓았지만 월요일인
오늘까지 감기몸살기가 완전히 가시지를 않았다. 게다가 몇 주 전부터
간헐적으로 지속해온 컴퓨터 집중 작업 덕에 어깨 관절에 이상이 생겨
마우스 클릭 한 번 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지난 주를 대략 놀아제낀
덕분에 머리 속으로는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계획하기'가 쉴틈없이 돌아가고
있다. 이런 계획하기가 나에게 조금도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다. 예전에
학업이나 업무에 쫓기며 살 때에는 계획하기 그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지금은 머리 속으로 계획하면서 때로는 오금이 저릴 정도로 신이 나기도
한다. 허황된 거대한 계획을 세워놓고 신이 나는 게 아니고,
과거에는 허황되어 보였던 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조금씩이나마 다가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신나는 것이다.
몸이 아플만 하여 아팠으니,
이제 몸을 좀 쉬어주고, 겸허한 마음으로 갈 길을 계속 가야겠다. 세상
모든 일에 장애물이란 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길에 있어서는 생계를 위한 돈벌이도, 때로
앓아 누워 아무 일 못하게 되는 것도 다 장애물이라 여겼었지만, 그것들이
장애물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것을 점점 더 알게 된다. 물론 뻐빠지게
노동해서 쥐꼬리만한 봉급을 받거나, 심각한 병에 걸리게 되는 것을
'선물'이라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그러한 '장애물'(또는 '선물')과
조우하게 된 개개인이 결정할 문제일 것이다. 내가 조우하는 정도의
이런 장애물은 물론 장애물이라 부를 수도 없다. 할 일이 너무 많아
몇 달씩 하루도 못 쉬고 일해야 할 때의 피로함도 내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런 식으로 돈벌이를 위하여 열나게 일해야 할 필요가 없음을 나의
깊은 내면에서 결정할 때가 되면, 그 때부터는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내게 그런 노동이 필요함을 내가
잘 알고 있고, 따라서 그런 노동은 내게는 다 선물이다. 생계를 위한
노동에 신성함이 덜 깃들어 있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내게 노동이
더 이상 불필요하다고 스스로 결정하게 되는 것은 내가 벌어 놓은 돈의
액수가 아니라, 내 생활의 영적인 추구의 집중도와 관련이 있는
사안이다. 전적으로 나 자신에게 달린 문제이다.
몸과 정신을
쉴틈없이 굴리며 앞으로 질주해가다가 문득 만사를 접고 자리에 누워
딩굴거리며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즐거운 몸살이라고나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