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또는 신적인(1) (2005/10/1)
©
Suk Hoon Han
땡볕
아래 공사판에서 노동중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몸 여기저기에 부상
입어가며 여름 내내 일해주었건만 품삯을 한 푼도 못 받았다고
한다. 친구와 공사판에서 함께 일하던 어떤 이는 아내가 중병이라
병원비가 급해서 업주에게 돈 내놓으라고 따지러 갔다가 되레 폭행
혐의로 구속되었다 한다. 얘기를 듣고 있던 내가 열이 받건만, 친구는
오히려 담담하다. 넌 열도 안받냐 했더니, 친구 왈, 열 받아 뭐하냐
나만 손해지. 뭐, 때가 되면 주려니 하고 기다린다고 한다. 넌 벌써
도사가 다 됐구나라고 친구에게 말해줬다.
노임 떼먹거나 체불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 열받게 하는 일인지 잘 알고 있다. 과거에 내 노임
제 때 안주었던 이들로부터 내가 얼마나 악랄하게 끝까지 돈 다 받아냈던가
회고해보니, 당장 그 달의 생활비가 수중에 없어 막막하게 되었을 때에는
거의 내 눈이 뒤집어졌던 것 같다. 나는 평소에 얌전하고
평화로운 인간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은데, 그 때에는 지독한 수금원처럼
행동했었던 게 기억난다. 처자식 얼굴밖에 안 떠올랐던 것 같다.
미국에서
첫 애 낳고 난 뒤에 잠시 생활이 힘들었던 때가 있었는데, 미국
정부에서 빈곤층에게 무상 배급해주는 아기 분유 쿠폰 타려고 동네 흑인들과
함께 길게 줄지어서서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한 시간도 넘게 기다린
뒤에야 내 차례가 되어, 관리에게 아이 출생증명서 등등의
서류를 보여주고 쿠폰을 타려했는데, 애 엄마의 위임장이 없어서 못주겠다
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이의 친애비임을 증명해주는 쯩들을 보여줘도
애비는 믿을 수가 없다는 통에 툇짜를 맞았다. 옆에 있던 흑인
아줌마가 딱한 듯이 가르쳐주기를, 애비들은 분유 쿠폰 타다가 돈으로
바꿔서 술 사마시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아내의 위임장
같은 걸 마련해서 다시 줄서서 분유 쿠폰을 탔다. 그렇게 줄 서서
여러 달 공짜 분유 받으며 살다가 나중에 형편이 좋아진 뒤에는 '에이
더럽고 치사하다'며 내 돈 내고 분유 샀다 - 그간 정부로부터 공짜
혜택 받은 것에 대해선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공부는 어렵고,
아이는 잠도 안자고 울던 그때, 애 먹일 분유는 다 떨어지고,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애비가 강도로 돌변하게 되는 심정을 아주
잘 이해할 것 같았다. 불쌍한 내 친구, 빨리 좋은 일자리가 나타나야
할 텐데. 난 그저 그에게 술이나 한 잔 사준다.
개구리 올챙이
적 까맣게 잊고, 친구는 어렵게 살고 있건 말건, 차 끌고 유람 다니는
거 조금 더 편하게 해보겠다고 수십 만원을 들여 그놈의 내비게이션
장치를 사서 차에 떡 달았다. 그리고는 처자식 데리고 강원도로 경상도로
유람을 떠났다. 누군가가 이에 대해서, 그렇게 딸애가 학교도
며칠씩 빼먹고 여행 가버리면, 여행 같은 건 가보지도 못하는 학교의
다른 아이들에게 위화감을 안겨주지 않겠느냐며 비난했지만, 철저한
개인주의자인 나, 신경 끄고 신나게 여행 떠났다. 여행 길에 호텔도
가보고, 콘도도 가보고, 그저 놀기만 했다.
그러나 공사판
출근하고 있는 친구에게는 여행간다는 말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내가
번 돈 내가 쓰겠다는데...'는 물론, 천박한 태도다. 그래도 나는 앞으로도 여행은
꼭 다녀야겠고, 따라서 이제부터는 소문내지 말고 몰래 다녀야겠다.
나는
돈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돈이 좋고, 돈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 삶이 돈의 축적을 목표로 삼지 않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돈을 벌면 여행 다니고 책 사고 밥
먹는데 다 써버리며, 돈의 축적을 도모하는 일에는 아예 등을 돌려버리는
것이다. 너무도 인간적인 나 자신을 비난하고 미워하거나 부정하지 않으면서,
내 삶의 주된 방향은 신성(神性)에게로 향해 있도록 유지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벌고, 또 열심히 써버린다.
누군가 오랜 만에
찾아와서 새삼스레 우정을 표시하면, 그게 다 돈 꿔달라 하기 위함이라는
세간의 금언은 대체로 정확하다. 그런 사람들 한두 번 겪은 것 아니지만,
얼마 전에도 그런 이가 또 나타났고, 나는 그 사람이 순수하게
나를 필요로 하여 찾아왔을 것이라 억지로 믿었다. 그리고는 얼마 후에
돈이 필요하다 하여 선선히 꿔줬다. 그는 물론 내게 돈을 갚지 않았고,
그가 그 돈을 가지고 자신의 삶의 재활을 위해 건전하게 사용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돈은 버린 셈 쳤고, 그와의 잠시의 교제는
그것으로 끝났다. 그래도 끝까지 그의 진실성을 볼 수 있기를 바랬건만.
사람이
돈에 울고, 죽이고, 살리는데, 그 돈을 초월한 인간의 수는 아마 지구상에서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라 짐작한다. 그래서 돈을 우습게 여긴다거나 초월했다는
이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신과 영성을 추구한다는 개인이나 단체들이
아무리 돈의 본질적인 중립성을 근거 삼아 '건전한' 부의 축적을
찬양하건 간에,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낸 예수님의 폭력적인 태도에는
다 그만한 타당성이 있었음을 믿는다. 신을 팔아서 돈을 버는 이들은
특히 신뢰하지 않는다. 고액의 영성 수련 활동들에 대하여 나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돈 안드는 영성 수련 방법을 만들어보고 싶다.
그런
걸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나의 신적인 부분이 아닐까 싶다.
